칼날 위의 사랑도 로맨틱할 수 있을까.
한 남자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중앙역에 들어선다. 이제 그의 삶은 거리 위의 사람들의 공간으로 편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껴안은 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을 무너뜨리는 칼날 같은 현실을 접하는 순간, 자존심이든 자존감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남자는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은 그가 힘겹게 끌고 온 캐리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마저 한 여자에 의해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는 심신적으로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캐리어가 사라지기 전, 여자의 체취와 감촉을 잊지 못하는 남자는 캐리어를 도둑맞은 데에서 오는 분노에 휩싸여 여자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캐리어 자체를 휘발시킨 여자와 막상 대면한 순간, 그는 그 '몹쓸 감촉에 의한 기억' 때문에 분노를 삭이게 된다. 자존심, 캐리어에 이어 분노의 불꽃마저 잃게 만드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렇게 남자는 '사랑을 시작'한다. 모든 걸 잃은 남자에게 사랑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챙겨야만 한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도 인간이기에, 어쩌면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택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삶이 더 칼날같아질수록, 여자가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자신의 사랑마저 의심하게 된다. 의심에서 나아가, 거리의 사람들에 익숙해져갈 때처럼 사랑이 무슨 소용이냐며 '놓아버리려는 때'가 잦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현실에서 그를 깨우는, 그의 뜨거운 피를 돌게 만드는 유일한 윤활유인 여자와의 관계를 놓지 못한다. 분명히 사랑일 것이다.
사실 필자도 '그들의 사랑은 커녕 삶도 모른다'. 필자를 대변해주는 인물들이 바로 거리를 '스치는' 사람들과 민원센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리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낄지언정 혐오와 경멸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렇게 거리의 사람들과 스치는 사람들의 간극이 그려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처한 현대 자본주의의 실상이다. 필자와 같이 거리를 스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은 '노숙자'라는 단순명사로 거론된다. 그들에게 '사랑은 사치'로 보여진다. 당장 돈 한 푼 없어 배를 곯이는 것이 그들의 삶인데, 우리의 관념 속에서 고결하다고 여겨지는 사랑이 그들에게 가당키나 한걸까.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의 사랑과 다르지 않은, 어쩌면 더 뜨거운 사랑을 한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한 최소한의 생계를 채워넣기 위해 '계획적인 삶'까지 행한다.
이제 그의 사랑이 아닌 '그들의 사랑'을 보자. 그들의 사랑을 읽는 내내 필자의 머릿 속에 이미지로 채워지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바로 레오 까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과 내동댕이 쳐진 절름발이의 사랑은 그들의 사랑과 닮아있다. 과연 저 '찌질한 삶 속의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에 대해 필자에게 물음하던 영화였는데, 이것이 소설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머릿 속에서 재생됐다. <중앙역>과 <퐁네프의 연인들>이 동행하면서 결국엔 '사랑은 삶 최대의 활력'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퐁네프의 연인들>이 엔딩에서 보여줬던 그들의 재회, 그리고 동행과는 달리 <중앙역>은 보다 현실적인 측면을 택한다. 점점 죽어가던 여자가 '진짜 죽음'과 맞닿는 순간, 그의 과거와 미래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는 고백한다. '나는 추억이나 기억 따위를 믿지 않는다. 그건 희망이나 기대처럼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실체가 없고 다만 거기 있을거라고 집작하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사람들 들뜨게 하고 결국엔 망쳐버리고 만다. (298쪽에서)' 어떻게든 자존심과 사랑을 지켜내겠다던 그에게 있어 과거의 추억 따위나 미래의 꿈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는 현실의 '돈'을 위해 살아가겠노라 다짐한다. 자존감마저 사치가 된 그에게는 일당의 양이나 일의 질 따위도 문제되지 않는다. 구걸을 위해 모든 구겨진 자존심을 웃는 표정 뒤에 숨겨가며 몹쓸 자본주의에서 '버텨내겠다'고 결심한다. 이것이 거리의 사람이 된 그가 택한 유일한 '결단'이다.
이렇게 냉소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만 소설이지만, 악취와 더러움에 뒤엉킨 사랑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역>속의 '그'는 꽤나 강단있고 로맨틱한 인물로 비춰진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거리의 집단에 편승되진 않았을지라도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타자가 정해놓은 일련의 규칙에 의해 생계유지를 해나가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것의 경이로움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칼날 끝에 내몰린 자들의 사랑은 사치도 뭣도 아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 '순수한 결정체'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과거는 썰물처럼 씻겨나가고 미래는 밀물처럼 다가올테다. 하지만 우리의 '지금'이라는 파도가 없다면 그 어떠한 것도 썰물과 밀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냉혹한 현실과 낭만적(혹자는 이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겠지만)인 사랑의 간극을 통해 삶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배어있는 <중앙역>. 흡인력에 이끌려 읽어내린 소설이라 그런지, 혹은 여자가 겪었던 복수의 차오름이 전이됐는지 몰라도 여운이 깊이 남는 작품이다.
[책 속에서]
세상의 모든 시간은 이들을 비켜가고 그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혀 있다. -p.59에서
상상 속에서 가방의 크기는 자꾸만 커진다. 실제로 내가 잃어버린 가방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상실감은 깊고 넓어진다. -p.67에서
이곳은 젊고 건강한 내게 가장 인색하고 야박하게 군다. 내가 가진 젊음을 대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중략) 당신은 늙고 나는 젊다. 그러나 이곳에 함께 있으니 결국은 똑같은 게 아닌가. 아니, 차라리 살날이 적은 당신이 나보다 낫지 않은가. -103에서
다른 누군가를 꿈꿀 수 없는 가난한 처지가 서로를 유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 -238에서
당신만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다.
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게 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건 지나가버리고 지나가버릴 말들을 함부로 지껄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순간엔 또 나는 기어이 말하고 만다.
이젠 너무 많이 말한 탓에 닳고 바라고 헤진 말들을.
더 이상 여자와 내게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p.247에서
더 이상 미래는 대비하거나 준비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십년 뒤, 백년 뒤의 삶도 미리 당겨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라도 지금 휘청거리는 삶에 지지대를 세워야 한다. -282에서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더 구차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고 중얼거린다.
-28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