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누군가가 남긴 메모

책 구매를 최소화하기로 결정한 후, 나는 자주 도서관으로 향한다. 알다시피, 도서관의 책 한 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배어있다. 다행히도, 치명적인 결벽증이 없는 탓에 대여 시스템의 덕을 보고 있는 요즘이다. 오늘은, 이 시스템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어내려 한다. 주제는 일맥인 두 개의 에피소드.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던 중. 어떤 머리카락이 책 한 켠에서 존재감을 드려냈다. 남성의 것인 듯 짧은 길이를 자랑했던 머리카락. 나는 그것을 입김으로 날려버렸는데, 그러는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 역시, 다자키 스쿠루처럼 다소 내향적인, 동시에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아닐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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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를 음미(?, 이 산문집은 이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해서)하던 중. '그해 여수'였던가. 그 페이지에 붙어있던 한 장의 포스트잇. 오리 면상이 상단 중앙에 그려진 귀여운 포스트잇에 새긴 이름(형태도) 모를 이(남성으로 추정)의 글귀. '오글거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몇 번이나 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네요. 그래도 나중 어느 날 이 쪽지를 다시 펼쳤을 때 미소를 지었으면 해서 글을 남겨요' 하... 사실, 박준의 산문집은 다소 오글거리는 경향이 있다. 한데, 그해 여수는 그 정도가 여느 것들보다 심하긴 하다. 한 번 적어볼까.

[그해 여수]
그래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 p. 27

응.
이런 글귀에는 '오글거린다'는 표현에 걸맞다. 사랑이 충만한 남녀 사이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런 글이나 말을 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 메모를 남긴 이 역시 사랑ing 상태는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만약, 사랑 중에 이런 글을 적었다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이 책에는 위 포스트잇만 부착돼 있지 않았다. '꿈방'이라는 제목의 글 마지막 부분에 붙여진 형광 주황색 포스트잇. 거기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도(자연-취소 표시-)한 끗 차이. 이렇게 글에 대한 감상이 적힌 글이 있는가 하면,

또 있다. 기대하시라.
'해남에서 온 편지'라는 소제목의 글 끝부분에 붙여진 핫핑크 색의 포스트잇. 거기엔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되시길. 좋은 글과 함께 마음 넉넉히'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럼, 익명의 누군가가 어떤 글을 읽고 이런 표현을 타인에게 공유하고 싶었는지, 작가의 생각을 적어보겠다.

[해남에서 온 편지]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 p. 69

작가의 글과 그것을 읽은 누군가의 감상을 모두 접한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넉넉한 마음의 누군가와 김치를 씹고 싶구나. 아, 왠지 모르게 겨울 이야기이지만 따듯해. 빨리, 봄이 오길'이라고.

놀랍게도, 위 세 개의 포스트잇 속 메모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단상이다. 글씨체가 모두 다른 걸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물론, 틀릴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한 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도 배어있지만, 머리카락도 (책갈피마냥?) 끼워져 있고, 그들의 단상도 새겨져 있다. 재미있다. 책 한권을 빌렸을 뿐인데, 나는 작가 한 명의 상상력과 감상만을 기대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들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반납할 땐, 포스트잇에 나의 감상을 남기려 한다. 도서관에서 책 좀 빌리는 누군가에겐 예기치 못한 미소와 공감을 전하는 일종의 프로젝트와도 같은 이 활동. 당분간은 재미 좀 붙일 것 같은 느낌이다.


- 2018. 08. 01. 39도, 사람이 녹을 수 있다는 걸 온 몸으로 체감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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