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 속에서 공백이라고 여겨지는 때를 사랑한다.
머리를 쓰는 일이든 몸을 쓰는 일이든 다른 어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는 기회를 희생할 수 없는 때가 있었다. 나는 삶 속에서 공백이라고 여겨지는 때를 사랑한다. 때때로 여름날 아침이면 늘 하던 대로 목욕을 한 후 문가에 자리잡고 앉아 해 뜨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햇볕을 쬐곤 했다. 소나무, 히코리나무, 옻나무에 둘러싸여 아무런 방해 없이 고독과 고요를 즐기며 넋 놓고 몽상에 잠긴 것이다 …… 그러다 지나가는 마차소리에 깨어나 시간이 한참 지난 것을 깨닫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절 속에 나는 성장했다. 마치 옥수수가 밤 사이 훌쩍 자라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은 애써 노력해서 얻어낸 것보다도 훨씬 값진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은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보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 듯 했다 …… 대부분의 경우 나는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가 해놓은 일들에 빛을 밝히려는 듯 날이 밝았고, 그러면 아침이었고 '어' 하는 사이에 밤이 되고, 그렇게 별로 하는 것 없이 시간이 흘렀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소리sounds>장에서
나는 종종, 출근을 위해 버스를 이용한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버스만을 이용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출근 시간 버스 탑승기는 조금 다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의 풍경은, 계절의 멋을 온전히 머금고 있다. 그야말로 '찬란'하다.
기온도, 햇살도 따스하다. 나는 도심을 거쳐 시골길로 향해 직장에 도착한다.
시골길을 약 20여 분 달린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 그 위에 안온한 정이 느껴지는 집들과 만난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나는 습관처럼 출근길에 버스에서 책을 읽는다.
한데, 지금의 나는 햇살 좋은 날엔 '자연스럽게' 독서를 중단할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책에 매료됐음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풍경들이 자신과 아침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유혹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럴 때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이내 책갈피를 꽂고, 덜컹대는 버스의 활동성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식물들을 온 몸으로 느껴본다.
책의 내용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찌됐건 두뇌 회전을 가동시킬 수밖에 없는 시간들. 하지만, 뇌의 활동을 잠시간 쉬게 내버려둔다. 뇌가 쉬는 대신 잡다한 심신의 찌꺼기들을 배출시키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자연치유. 그렇게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행복 한 잔을 마신 냥 나는 입맛을 다신다. '짭짭' 왠지 모르게 달콤하다. 분명 이런 내 모습을 우연찮게 보는 이가 있다면, '저 사람은 왜 들고 멍 때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고백하자면, 나는 자주 '멍'한 상태를 자처한다. 심지어, 한 번은 지인인 정신과의사에게 너무 자주 멍 때리는 것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그 사람은 "그러면서 쉬는거야. 걱정할 거 없어. 일부러 그런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거야."라고 말해줬다.
앞서 인용한 소로우의 글을 읽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가만히 풍경에 취해 '흘려보내는' 시간을 아까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는 적절한 '권위자의 격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치 내 편이 생긴 듯한 기분 말이다. 온갖 나무들에 취해 고독과 고요를 만끽했다는 그. 그 몽상의 시간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밝은 햇살과 어둠, 즉 자연빛에 의해 '어' 하고 깬 반면, 나는 시골 할아버지들이 걸어오는 말소리에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다.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책을 들고 있는 내게 "학생이요? 공부하러 가요?"라고 물었다. "아뇨아뇨! 저, 회사에 가요." "아~ 그렇습니까? 나도 이번에 내립니다." "아, 네. 먼저 내리세요."
그 할아버지와 거의 매일 마주치는 나. 든든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랄까. 이곳 사람들은 안면이 짙은 사이라 그런지, 버스에서 마주치면 서로들 인사 나누기 바쁘다. 나도 언젠가, 저 할아버지와 인사 나누는 사이가 될 것도 같다.
- 2016. 05. 08. My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