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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흰' 것들이 전하는 메시지
한강의 소설 <흰>



세상 모든 흰 것들에 대한 사색이 담겨있는 소설 <흰>. 사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의 느낌보다는 시집과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 한강.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흰' 것들은 순수하고 순결하며 그 어떠한 더러운 것들도 침범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닿아 있다.



소설을 위해 작가는 온갖 흰 것들을 끌어모은다. 강보, 배내옷, 안개, 젖, 성에와 서리, 눈과 만년설, 소금과 각설탕, 흰 새와 개, 백발과 흰 뼈, 구름과 모래, 백열전구와 불빛들 등…. 소설에서 활용된 총 65개의 '흰' 소재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이다. 결코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흰>에서는 이 소재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지고 결국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결국,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철저히 개체로만 느껴지던 관념들이 모여 하나의 소설로 완성되어가는 맥락과 마찬가지로, 각 소재들은 철저히 개체로써의 경계가 무너진다. 스물 세 살의 젊은 엄마가 딸아이를 낳았지만 이내 운명을 달리하고,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는 연신 언니를 그리워한다. 죽음 이후의 삶을 얻은 여자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가슴에 품고 있다. 어둠 속에서 지내다 세상 밖에 태어난 아기는 온갖 때를 입으며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흰 옷을 입고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많은 이들이 삶을 '희로애락'으로 크게 비유하지만, 어쩌면 삶은 흰 것 하나만으로 정의내려질 수 있을 것도 같다. 흰 것으로부터 시작해 흰 것으로 끝나는 그런 것. 바로 인생 아닐까.


단단한 것들로 지탱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삶. 하지만, 어쩌면! 진짜! 작가가 썼던 것처럼 우리의 삶은 '흰' 모래와도 같이 부스러지고 날아갈 수 있는 가벼운 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모래의 일부가 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자 진리이다. 결국 우리는 희고 가벼운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모래」중에서'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과 흰빛, 검음과 불꽃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ㅡ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백목련」중에서'


소설을 읽다보니, 괜스레 스스로가 고결해진 느낌이 일렁였다. 스스로의 생(生) 자체가 고귀하게 느껴졌고,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환경(풍경)들이 훌륭하고 순결하게 느껴졌다. 흰 눈 위를 때 묻은 발로 짓누르며 걷는다 할지라도 가볍고 새하얀 눈송이들은 그것들을 '살포시' 덮어버린다. 이 아름다운 세상 위 흰 존재들은 작가의 소설로 하여금 그 고결함이 재평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흰 것들은 좋다. 개인적으로 흰 색(물론, 그만큼 검은색도)을 좋아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흰 색과 빛, 사물들에 집중하지 못해왔나' '흰 것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왜 이토록 귀 기울이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작가가 쓴 작중 화자가 겪는 익숙하고도 극심한 편두통처럼 세상 모든 흰 것들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동시에 허를 찌르는 메시지를 갖춘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설 <흰>은 서문에서 언급했듯, 시집 같기도 하고 작가 개인의 에세이 같기도 한 책이다. 작가의 다른 저작들에서 활용되는 소재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간혹 그 소재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작가를 매료시켰는지에 대한 상황(배경)도 넌지시 전달된다. 마치, 작가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듯한 소설 <흰>. 흰 여백이 지닌 여운의 힘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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