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밀크티 쿠키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유튜브에 ‘광고없는아침음악’을 검색한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일렁이는 코스모스가 섬네일(thumbnail)인 영상을 선택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 물을 마시기 전에 양치를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렇게 한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지 거울 속 내 모습이 눈곱 몇 개 붙어있는 것 말고는 그럭저럭 정돈되어 보인다. 거실로 나와 바닥에 널브러진 블록 조각들을 발로 쓱 밀어 누울 자리를 만든다. 살짝만 수그려도 젖가슴이 훤히 보이는 노브라 차림으로 민소매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스트레칭을 한다. 내 몸이 가볍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이제 거의 마지막 동작인 엎드려서 상체 들어 올리기를 하려는데, 우다다다 하는 발소리와 함께 “엄마” 하고 등 위에 올라타는 우리 집 작은 성씨. (나는 종종 남편을 큰 성씨, 아들을 작은 성씨라 부른다.) 비로소 오늘 하루가 진짜 시작되었구나! 먹이고, 씻기고, 치우기를 반복하는 하루.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이슈가 있는 날, 한 달 전에 등록한 수필 수업이 개강하는 날이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외벌이까지 하는 남편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지금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누가 봐도 내가 제일 어리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는 내가 너무 어리다(?). 교수님께서 쓰고 계신 꽃장식이 달린 벙거지 모자 사이로 흔들리는 은색 머리칼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닌데, 선생님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봤을 때의 모습하고 다른데. 얼른 눈을 돌려 혹시 내 또래에 친구가 한 명은 있지 않을까? 하고 수업 준비를 하고 계신 학생분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없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가진 이야기를 써서 나누었을 때 “너는 그랬구나.”하고 들어주고, 품어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원래 막내는 뭘 해도 귀엽고 웬만한 잘못은 다 용서해주지 않던가. 지난 5년간 나는 우리 엄마의 막내딸이 아닌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정신없이 살면서 스스로 못난 모습만 골라 끄집어내 나를 괴롭히고는 했었는데, 이 수업을 통해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글감을 한 편의 이야기로 써 내려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소개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10번은 넘게 한 자기소개인데 할 때마다 긴장된다. 선생님들께서는 이름, 나이, 직업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 수업을 수강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이루고 싶은 작은 소망들을 말씀하셨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아내분과의 사별 후 힘들었던 마음을 글쓰기를 통해 치유하셨다는 선생님의 사연은 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 아이가 중학생이 되니 여유가 생기셨다며 그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글쓰기에 도전했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잘 참으셨구나. 나는 걸음마도 못 뗀 아기를 앞에 두고 스스로 뭐가 되고 싶고, 하고 싶어서 안달 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했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이야 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아, 듣다 보니 이제 내 차례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OOO이고 나이는 37살, 5살짜리 남자아이 하나를 둔 엄마입니다.”
5년 전 자기소개하고는 다르지만 나는 여전히 ‘나’이다.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내년에는 제 직업은 작가입니다. 하고 한 줄 추가하는 것이다.
수업에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강의실 한편에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놓은 테이블에 과자를 좀 구워서 놓아볼까 하고 생각했다. 어른들께서는 홍차 쿠키를 좋아하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