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따코 Dec 15. 2022

이제야, 나홀로 첫 눈

첫눈을 맞았습니다.

사실은 첫눈은 아니고 이미 여러 차례의 눈이 왔다 가셨지만 저는 제대로 맞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잠이 들어있거나 밖을 보기 싫어서 커튼을 꽁꽁 닫고 방 안에 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늦잠을 잤습니다. 옆집과 앞집이 분주히 준비를 마치고 일자리를 향해갈 때 저는 꿈속에서 미래의 제 남편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얼굴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창을 여니 함박눈이 펑펑 나리고 있는 모습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오랜만에 들뜨는 마음에 얼른 밖에 나가 눈을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지 않게 바로 몸을 일으켜 세수와 양치를 하고 새벽배송을 시켜놓았던 물건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아이보리색 비니를 머리에 눌러쓰고 패딩에 몸을 꼭 안긴 채 집 밖을 나섰습니다.


눈은 사람을 설레게 합니다. 온 세상이 백색으로 덮이는 기묘한 날은 흔히 있는 날이 아니기도 하고 하얀색이야말로 누구든 싫다고 단언하기 힘든 색이 아닐까요? 깨끗한 백색을 보면 잠시간 멍해지는 일이 자주 있곤 합니다. 순한 것에 대한 경외감과 반성의 시간이 저항할 수 없이 찾아온달까요?


작은 결정들로 이루어진 눈은 밟으면 밟는 대로 뭉치면 뭉치는 대로 여러 모양을 만드니까, 더욱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발자국, 눈사람, 눈꽃, 눈송이 같은 발음하기에도 간지러운 것들이 눈에서 파생됩니다.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쌓인 눈은 배로 아름답고 오토바이의 백라이트만 피해 쌓인 눈은 메롱하는 듯 익살맞은 얼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교하는 아이들은 눈길이 무섭지도 않은지 자그마한 운동화를 신고 마구 달립니다. 안전봉, 담벼락, 과일가게 천막 위에 쌓인 눈을 서슴없이 그러담으며 친구에게 혹은 자신의 눈앞에 뿌려대며 마음껏, 눈을 즐깁니다.


나는 그에 몇 배가 되는 몸집을 가지고서도 행여 눈길에 넘어지진 않을까 바닥만 보고 걷는 일을 멈추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분명, 눈으로 인해 즐거운 이들이 온 지구에 많은 것을 알기에 눈이란 축복입니다.


어른들에게 눈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죠. 아파트 단지마다 경비원들이 기다란 빗자루로 사람 가는 길을 치우기 바쁩니다. 큰 도로에 나오니 대포 같은 에어건을 발사해 눈을 날려버리기도 하네요. 그 덕에 사람들은 조금은 바닥을 덜 보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넘어지는 일도 덜겠네요. 눈을 치워야 하는 이들도 눈으로 인해 조금은 즐겁다거나 눈을 좋아하는 가족이 있다거나 더 하기 싫은 일을 조금 면했다거나 했으면 좋겠네요.


눈이 오니 그간 아껴놨던 겨울 노래들을 마구 꺼내 듣고 있습니다. 이거 꽤 행복합니다. 겨울은 정말 음악 듣기 좋은 계절입니다. 세상이 한결 고요해지잖아요. 그런데도 마음은 한껏 부풀 날들이 많아서 음악의 힘을 빌려서 겨울의 힘을 빌려서 오랫동안 못 봤던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연락해볼 수도 있으니까요.


겨울 싫어. 여름 좋아. 인간이 오랜만에 겨울도 참 좋다고 생각한 날이었습니다. 아 겨울 좋아.  

비니 따뜻해

이 글을 쓰고 집에 돌아오니

연락을 해봐야지 마음 먹었던 친구 두 명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은 진짜 마법 같은 날입니다. 눈의 마법?

매거진의 이전글 All your December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