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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옴표 필름 May 09. 2023

견적서를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아요

항상 어려운 견적서 작성과 페이 조율 영역에 대하여

  프리랜서에게 가장 반가운 연락이 뭘까? 당연히 작업 제안 연락이다. 새로운 작업 제안 내용의 이메일이나 전화가 오면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한 번도 거래해본 적 없는 새로운 고객사일 때도, 이미 작업을 해본 적 있는 곳에서 다시 연락이 올 때도 둘 다 정말 설레고 감사하다.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을 하게 될지 제안 메일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목만 보고 기대하기 시작한다.


  영상 프로덕션을 약 3년간 운영하면서, 이 업계의 성수기와 비수기가 언제인지를 파악하게 됐다. 내가 제작하는 영상은 크게 기업/브랜드 유튜브 채널에 올라가는 영상과 아이돌 관련 채널에 올라가는 영상으로 구분되는데, 전자의 경우 기업 마케팅팀 혹은 대행사 담당부서에서 상/하반기로 나눠 캠페인 전략을 짜기 때문에 각 시즌의 시작점인 3월과 9월에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래서 그 때부터 성수기다. 꽃피는 봄과 천고마비의 계절에 가장 바쁘다는 뜻인데, 하필이면 이 두 시기가 가장 날씨가 좋은 시기다. 그렇기에 영상 일을 하면서 벚꽃과 단풍을 보러 가기가 항상 쉽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돌 콘텐츠의 경우 컴백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다르고, 일 년에 수많은 아이돌들이 여러 번 컴백하기 때문에 크게 성수기와 비수기로 나누기는 애매한 것 같다. 또한 아이돌의 경우 팬들과 콘텐츠로 꾸준히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휴식기에도 콘텐츠를 자주 내는 편이다. 설날 콘텐츠, 추석 콘텐츠, 크리스마스 콘텐츠 등등 주기적으로 다양한 명목(?)의 콘텐츠를 제작한다. 하지만 아이돌 시장 역시 연말연시에는 다른 때에 비해 비교적 컴백을 잘 안 하는 건 맞으니까, 일단 비수기라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경험상 프로덕션의 가장 한가한 시기는 매년 1, 2월이었다. 영상업계의 성수기와 비수기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일이 잘 들어오지 않는 연초가 되면 괜시리 불안하고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다.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돈을 못 벌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각종 취업 사이트에서 채용공고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다행히 2월 말부터 3월까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3월부터는 왜 연초에 최선을 다해 놀지 않았는지 후회하며 벚꽃 구경도 못 하고 일만 하는 삶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초 시즌을 현명하게 보내기로 다짐한다. 나 혼자 두 가지 별명을 붙였다. '보릿고개 시기' 그리고 '자기계발의 시즌'. 다른 달에 비해서 보릿고개인 건 확실하다. 그러면 불안해하지만 말고 그동안 바빠서 못 했던 걸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기계발에 힘쓰는 시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경험상 불안해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었다. 다만 진짜 가만히 있진 말고, 작업 계정을 꾸준히 광고 돌리거나 영상인 커뮤니티에 홍보글을 올리며 마케팅에 힘썼다. 프로젝트를 함께할 프로덕션을 찾고 있는 모집공고 게시판을 꾸준히 들어가서 지원도 놓치지 않고 하다 보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성과가 분명 있었다.


  이렇게 나만의 노하우가 생기면서, 마인드컨트롤과 연간 계획은 어느 정도 각이 잡혔다. 이만큼 온 것만도 스스로가 정말 대견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초조하게 하는 영역이 있는데, 바로 견적서 작성 영역이다. 이건 오히려 맨 처음 프리랜서 일을 시작했을 때가 더 쉬웠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이유가 뭐냐고? 바로 내 노동력에 알맞은 페이를 가지고 기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영상 일을 시작했을 때 페이 조율이 쉬웠던 건 당연했다. 그 시절에는 주는 대로 일을 받았다. 단 한 번도 '페이가 너무 짠데..' 혹은 '조율이 조금 가능할까요..' 같은 말조차도 꺼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적은 페이로 묵묵히 계속 일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괜히 잘못 말을 꺼냈다가 아예 거래가 끊길까 봐 두려웠었다. 사실 부드럽고 분명하게 잘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땐 노하우도,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확신도 지금보다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도 웬만해서는 주는 대로 일을 받는다. 다행히 대부분의 일이 처음보다는 인간적인 수준의 페이로 상향평준화되었다. 야무지게 포트폴리오를 쌓고 관리한 보람이 있나 보다. 하지만 대체로 페이는 만족스럽지 않다. 처음에 전체 견적을 받고서, '이 정도면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했다가도 세부사항을 나눠서 견적을 재정리하다 보면 커 보였던 돈이 다 어디로 증발했는지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돈은 또 적어진다. 프리랜서로 맨 처음 나왔을 때는 나 혼자 편집하고, 그만큼만 받았기 때문에 쉬웠는데 이제는 여러 감독님들의 페이와 기타 진행비 등을 다 같이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일을 주는 쪽에서는 당연히 가성비 있는 진행을 원하고, 외주 감독님과 나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고생한 만큼 챙겨가길 원한다. 사실 프리랜서의 복지는 스스로 챙겨야 하기 때문에 견적 조율을 정말 정말 잘 해서 내 몫도 알차게 챙기는 게 맞다. 그게 다 같이 그렇게 되기가 늘 힘든 시스템이라 슬프지만.


  보통 새로운 일 연락과 견적서 작성은 비수기에 많이 이루어진다. 당연하다. 그래야 픽스를 짓고 계약 후 성수기에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 1, 2월에도 나는 정말 많은 연락을 받고, 참 많은 견적서를 작성했다. 아마 견적서를 작성한 족족 다 성사되었다면 지금 부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올해 초에는이상하리만큼 대부분의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기존에 하던 작은 일 몇 가지 빼고는 새로운 일을 받은 게 거의 없었다. 어떤 건은 내부에서 그냥 엎어지기도 하고, 다른 시즌으로 미뤄지기도 하고 이유는 다양했다. 이유라도 알면 감사했다. 보통은 작업 제안이 와서 반갑게 답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견적서만 보내면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잠수를 탔다. '견적서 보내드렸는데 진행 안 하시나요?'라고 굳이 연락하기도 애매하다. 어쨌든 이유가 있으니까 연락을 안 했겠지 하고 말았다.


  견적을 높게 불러서 연락이 안 오는 것 같다면, 견적을 낮추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을 따내겠다는 생각만으로 견적을 낮춰버리면 일이 성사되더라도 진행하면서 정말 힘든 변수를 많이 겪을 수 있다. 우선 실력 있는 외주 감독님들을 부를 수 없게 되고, 나는 고생만 하고 돈도 얼마 못 가져가게 될 것이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돈도 좋지만 릴리즈된 후의 좋은 반응들을 보며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고생 후 남는 게 턱없이 적은 페이라면 때때로 삶의 보람을 못 느낀다. 나 자신을 위해서 적어도 스스로 이 만큼은 가져가자는 약속을 하며 견적서를 쓴다. 그래 봤자 소심해서 높게 지르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연락이 안 온 건, 그들에겐 여전히 높게 느껴졌나 보다. 그럴 때 이제는 그냥 인연이 아니겠거니, 하고 만다.

  

올해 2월 중순엔 정말 견적서만 썼다. 심지어 여러 버전으로 써서 보냈는데 성사되지 않은 건도 있다!


  보통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좋은 포트폴리오를 가진 업체 혹은 더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한 업체와 성사되었기 때문일 거다. 정말로 우리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는데 프로젝트가 불발되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렇게 견적서까지 써서 보냈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면 허무하지만, 이 일을 지속하려면 겪어야 할 어쩔 수 없는 과정인 것 같다.


  언젠가 견적서만큼은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견적서 영역에도 노하우가 있다면, 정말 꼭 알아내고 싶다. 브런치에 '프리랜서 페이 협의/견적서 백전백승 꿀팁' 혹은 '내가 원하는 페이로 원하는 작업을 따내는 방법' 같은 제목으로 글 쓰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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