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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Jun 20. 2023

며느리는 왜 며느리를 학대하는 시어머니가 될까?@못골

#2. 며느리는 왜 나쁜 시어머니가 되는가?


사용자에서 노동자로, 혹은 노동자에서 사용자로, 박수치는 사람에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바뀌게 될 때 올 인식의 변화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며느리에서 시어머니의 지위로 바뀐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현재 심성에 근거하여 앞으로 변화를 예측하지만 너무나 급격하게 바뀐 지위는 그런 예측마저도 대부분은 빗나가게 된다.


현직에 근무할 때 남교사보다 여교사들이 육아, 가사로 업무에 부담이 더 크리라 생각했다. 대개의 교사들은 정시 출근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한다. 일찍 출근하니 30분 정도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퇴근 시간을 조정하자는 건의를 했다. 여자 학교장은 자신이 교사일 때는 학교가 전부였고 학교생활에 전념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젊을 때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여 여교사들의 고단함을 덜어 주려는 배려보다는 자신이 당했기 때문에 젊은 교사들이 학교생활에 전념하는 근무 자세가 당연하다. 그래서 퇴근 시간 조정은 불가하다고 한다.


군대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악의 대물림이라고 할까? 졸병 때 구타를 많이 당할수록 선임이 되면 구타를 많이 행하는 사병이 된다. 나는 맞았지만 내 후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겠다는 악의 연결고리를 끊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으면 사회 집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악의 고리를 끊기가 어렵다.


며느리 학대는 조선 시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남존여비 사상과 상놈과 양반의 구별이 뚜렷하던 시대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그때는 모든 곳에서 차별과 불평등이 당연시되던 사회 구조였다. 남성들이 혼인하면 아내와 처가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 혼인제도에서 친영제로 조선 중기 이후 신부가 시가집으로 시집을 가는 제도로 바뀌었다.


시가집에서는 며느리가 최말단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면 시어머니가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하던 노동을 며느리에게 전가한다. 며느리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육체적으로 핍박하는 가학적 입장으로 바뀌어 이제 시어머니는 군림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가 조선 시대 일반적이었다. 늘 시킴을 받는 며느리는 고되기 이를 데 없지만, 상대적으로 며느리에게 명령하고 징벌하는 상급자로서의 시어머니 지위는 누구나 갖고 싶고 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런 지위가 주어지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행위가 전부인 양 생각하고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 것이라는 이심전심의 자비심은 애써 마음 한구석으로 짓눌러 버린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같은 사람이다. 지위가 바뀌니 그에 맞추어 내재하고 있던 복수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당했던 그 고난 겪은 시절을 너도 당해야 한다는 몹쓸 심성이 시어머니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여자로 태어난 일, 조선에서 태어난 일, 그리고 남편을 잘못 만난 일을 인생 최대의 후회스러운 일로 들었다. 그런 후회는 지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리적 환경은 농경사회에서 우주 시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지만, 심리적 환경은 아직도 조선 시대 말기에 머물러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몇몇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선도역할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가능하다.


딸, 며느리, 시어머니의 갈등 고리가 남자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남자 역시 고부 갈등 사이에서 취해야 할 입장이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아내 입장보다는 효자라고 하는 전통적 입장을 중시하여 어머니 편에서 아내를 고압적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인식이라면 이 악순환의 벗어남은 거의 절망적이다. 그런 문제로 많은 가정이 파탄 나기도 한다. 힘들게 핍박받는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은 고부간을 조정하고 중재하며 밀착시켜주는 타협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적 요소는 여전히 우리 정신세계에 사회문화의 제도적 잔재로 존재한다. 고부갈등도 그러한 잔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오늘날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또 다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변하여 오히려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시집을 사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며느리에게 사는 시집살이는 이미 서구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부자연스러운 고부 관계가 싫다 보니 혼인한 자녀는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부모 역시 자녀와 서로 멀리함으로써 영향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 독립적 관계를 유지해 서로 심리적 편안함을 도모하려 한다. 그 결과 오늘날 혼인한 자녀와의 가족관계는 심리적으로 과거보다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며 독립적인 가족관계로 바뀌어 있다.


고부 관계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고 그 관계 속에 서로를 녹여 가는 과정이다. 너를 보며 나도 그렇구나! 하는 반성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이 먼저이다. 마음을 열고 측은지심을 드러내어 서로 얼마나 힘들까! 하는 자비심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의 업적을 혼자서 이룬 것으로 착각하지만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지원과 연대와 관계 속에서 나의 현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따뜻한 심성을 베풀어 함께 가족 문제를 개선해 나가려는 동반자로서 연대감이 필요하다. 


<어휘 해석 첨가>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에 38년을 머물렀고 서울에선 10년을 산 것으로 돼 있다. 며느리보다 딸로서 오래 산 것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중반은 현모양처의 토양조차 조성되지 않았다. 시집을 전제로 자식과 남편을 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서 당시 혼인 관행을 엿볼 수 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여자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남자는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란 뜻이다.

*남귀여가혼 제도 =고구려 서옥제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남자가 처가에 장가드는 형태, 조선 시대 중기 이후까지 이어짐

*차이점 : 서옥제는 혼인 후 일정 기간 처가에 머물다 남편 쪽으로 거주지가 정해짐. 남귀여가혼은 혼인 초기 후의 거주지가 남편의 집으로 고정되지 않음. 우리나라 전통혼례는 조선 중기까지 “남귀여가혼”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고,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친영례(신랑이 신붓집 가서 식 올리고 신부를 데려옴) 는 보통 왕실 같은 데서나 하던 것, 18세기 이후에야 민간에 퍼짐. 그전까지 주류풍습이 아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있는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저자 이순구가 전하는 조선의 ‘색다른’ 가족상이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매우 달랐다는 거다. 17세기 이전까지 딸은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상속재산을 결혼 후에도 관리했다. 칠거지악이라는 말은 있었으나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령 큰 죄로 몰렸던 자식을 못 낳는 문제조차 ‘양자’로 해결됐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은 “꽉 막힌 남성 중심사회가 아니었다.”


‘장인 집(장가)에 든’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풍습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를 깨뜨린 건 중국 바람이다. 부계 위주 문화가 선진적이란 인식이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여인의 숨통을 조이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딸이란 정체성이 며느리로 바뀌는 순간 가족의 역학관계는 적잖은 변화를 겪는다. 


출처 : 16세기 조선엔 처가살이만 있었다, 2011-11-25, 이데일리 오현주




[#2. 며느리는 왜 나쁜 시어머니가 되는가?]  

 - 아버지 못골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8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7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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