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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Jun 20. 2023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할 때(@흔희)

#2. 며느리는 왜 나쁜 시어머니가 되는가?

  업무 조정으로 새로운 부서에 근무한지 한 달 즈음이 지났던 날이었다. 사무 보조원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 문제로 육아기 단축 근무제를 쓰고 있어서 2시 이후부터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하루는 난감한 얼굴로 부탁을 하였다. 퇴근 전에 인쇄실의 작업이 끝날 것 같지 않으니 대신 문을 닫고 보안 키를 눌러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작업이 끝나자 인쇄실 문을 닫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리자가 내게 인쇄실 문을 닫은 연유를 물었다. 사정을 말하자 사무실 내에서 그녀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다들 고등학생, 대학생을 키우는 워킹맘들이었다. "문 닫아주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라고 말하니 한 사람이 "같이 애 키우는 입장이라서 편 들어주는 거냐"며 가시 박힌 농담을 건넸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애를 키울 때는 그런게 없었던 때라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말투는 나긋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아서 멋쩍게 웃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계속 그 장면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육아기 단축근무제를 쓴다 해도 일을 덜어주진 않는다. 짧은 근무시간 내에 업무를 다 해내야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일한다. 나에게는 보이는 것들이 왜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호되게 신고식을 경험한 선배가 후배에게 더 잔인한 경우를 흔치 않게 본다. 같이 아이를 키워보았지만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먼저 걸어본 선배가 후배에게 보여주는 여유는 없다. 더 높은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댈 뿐이다. 사회 생활이니까. 인정을 바라기에는 너무 삭막한 곳이니까 그런 것이겠지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아니다. 안식처라고 일컬어지는 가정이라는 조직에서도 이런 부류의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시어머니의 심술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는 말처럼 말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되고 그녀는 다시 며느리와 갈등한다. 세대를 이어 고부갈등은 전승되고 있다. 


  결혼을 기점으로 며느리는 시가라는 새로운 조직에 편입된다. 사위는 처가에 가도 자신의 성을 유지한채 '~서방'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며느리는 '새아가'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대우받는 사위와는 달리 며느리는 기존의 조직에 편입된 새로운 구성원으로 대우받는다. '새로운 아기'가 되어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레이스를 시작한다. 이미 그 과정을 혹독하게 겪은 선배가 있다. 업무를 인수인계하고자 하는 선배와 이에 허덕거리는 후배가 불협하기 시작한다. 이 조직의 기존 멤버였던 남편과 시아버지는 방관한다. ‘새아가’의 미숙함 정도로 넘어간다. ‘새아가’는 괜히 맞섰다가는 집안이 시끄러워질 것 같다. 그래서 참는다. 불합리하지만 이 평온함에 만족한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새아가’ 덕분에 집안은 평온하다. 그리고 ‘새아가’는 시어머니가 된다.


  문제는 ‘새아가’는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폭력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하기에 시집살이를 폭력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시집살이가 모질어 질수록 내 안에서 싹트는 슬픔, 고통, 정의감, 자율성을 외면한다. 참고 견뎌낸 자신의 인내심에 몰두한다. 험준한 텃밭에서 싹을 틔워낸 자신에게 시련을 극복한 자아상을 부여한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된 선배 ‘새아가’는 후배 '새아가'에게 말한다. ‘나도 했던 것을 왜 너는 못하니. 나는 더한 것도 견뎌냈단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고단함에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며 규율의 잣대를 들이민다. 자기가 견딘 세월에 비하면 며느리의 삶은 수월하다고. 나는 별난 시어머니가 아니며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고부 갈등이 대를 이어 전수되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부갈등의 대물림을 시어머니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고부갈등이 대물림이 된 기저에는 그 집안의 기존 멤버였던 남편과 시아버지의 방관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시절에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고 보폭을 함께 맞춰주는 그 누군가가 집안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말살해가며 버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바깥 양반'이 밖으로 돌면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동안 '안 사람'은 엄마, 며느리가 되어 객체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집안의 평화가 누군가의 희생을 먹이삼아 일구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또 다른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그 누군가는 그녀가 자신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지해줬어야했다. 집안의 가풍에 익숙한 사람은, 그래서 그 문화에 걸맞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며느리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그 집에 있어 왔던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부갈등의 대물림은 피해자들의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수되는 과정일 수 있다. 인간적인 감각이 말살된 시어머니가 어떻게 며느리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남편과 시아버지가 나쁜 시어머니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묻어둔 채, 우리 사회는 비난의 화살을 나쁜 시어머니와 고분하지 못한 며느리에게만 쏟아대고 있다.
  
  임신한 후 12주가 되었을 때, 무리한 탓인지 갑자기 하혈을 했다. 놀란 마음에 부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병원에 달려간 적이 있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고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이 났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부장은 애를 낳은지 오래돼서 자신이 잘 챙기지 못했다며 내가 맡고 있는 업무중 하나를 덜어 가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기 단축근무제를 사용할 때, 나를 타 부서로 이동시키려는 여성 관리자가 있었다. 제시하는 이유도 납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관리자에게 대신 쓴소리를 해주던 부장도 있었다. 동동거리며 아이를 키워냈던 자신과 겹쳐보였다고 했다. 사회성은 공감에서 비롯된다. 공감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여 상대방에게 다가가게 하는 힘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것은 비단 고부갈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간호사의 태움 문화, 학교 폭력, 군대의 군기 등과 같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양산해내는 사회 구조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런 구조를 해체하는 힘은 타인의 아픔을 볼 줄 아는 공감, 즉 사회성에서 나온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당함을 견딘 자신의 경험을 무기로 쓰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인내의 경험을 곤경에 처한 상대를 이해하는데 쓰길 바란다. 견디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은 또 다른 고립감과 외로움을 낳는다. 그 고리를 여과없이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고리를 끊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고통을 호의로 전환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우리 사회는 살아갈만하다. 


사회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 사회는 좀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2. 며느리는 왜 나쁜 시어머니가 되는가?]  

 - 아버지 못골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8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7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ddbee/19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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