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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Jul 21. 2023

시팔도라의 상자(@아난)

#4. 좋은 친구에 대하여

내게는 친구 ‘윤들‘과 나누는 ‘시팔도라의 상자’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어디에도 내놓지 못할 치부나 걱정,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다. 우리는 여과 없이 나눈 대화를 ‘시팔도라의 상자’로 칭한다. 서로 바닥까지 내려가 이야기하다 이 대화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는 걸 상상해보면 참으로 아찔하다. 그러나 시팔도라의 상자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이 상자 안에서는 자유롭고 어떤 의견을 내어도 괜찮다.


‘윤들’은 내게 큰 힘이 되는 친구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이 든다. 매일매일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떡볶이 이야기를 하다가 직장 고민, 사랑, 미래, 심오한 인생관까지 경계 없는 대화가 펼쳐진다. 어떤 견해, 취향을 드러내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서로에게 있다. 그래서 내 안에서 말을 거르지 않고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와 안정감이 있다.


‘윤들’과 나는 직장 동료로 만났다. 처음에는 직장 동료로서 미묘한 경계심을 세웠다. 이력서 사진 속 야망 넘치는 노련한 일타 강사 같던 그녀의 기세에 놀라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환하게 웃으며 상대를 늘 깍듯이 배려하는 친구다. 그렇게 점차 경계선을 흐리며 서로의 인생으로 들어갔다.


첫 직장에서 먼저 퇴사한 윤들은 이후 두 번의 이직을 거쳤고, 나는 네 번째 일터에 자리 잡으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멀어져 강한 의지를 가져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을 함께 이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랍고, 함께 늙어가고 있어 좋다.


윤들은 불나방 같은 사람이다. 자신을 태워서 주변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참는 것이 익숙하다. 어떻게든 민폐가 되지 않으려 1인분의 몫 이상을 하려는 윤들의 성향 덕분에 가는 직장에서마다 인정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가며 윤들은 변했다.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진가를 깨달아 가며 삶의 무게 중심이 점차 자신에게로 왔다.


윤들에게는 ‘항아리 이론’이 있다. 가족, 친구, 일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곳에 에너지를 쏟는다. 윤들은 자신에게는 하나의 항아리만이 존재해서 모든 걸 그 항아리에 담으려면 우선순위에 따라 빼고 채운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편안함보다는 상대를 우선시해왔다. 관계를 잘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진빠져했다. 항아리가 여러 개라 사랑도 일도 잘 구분하여 항아리마다 자신의 에너지를 잘 안배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워했다.


윤들에게도 항아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헌신을 다하는 불나방의 에너지는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이 더 이상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는다. 자신과 주변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자신만의 항아리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여유가 생겼다. 그 항아리들이 버겁고 화로 가득 차면 언제든 시팔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나 또한 일상이 부서지는 순간이 오면 윤들과 시팔도라의 상자를 열고서 속시원하게 대화하며 한숨 돌렸다. 그럴 때마다 윤들은 늘 곁에서 나의 자책 회로를 끊어주고 내 자신의 좋은 면을 돌이켜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글을 쓰려 다시 그리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를 읽어보니 원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였다. 후대 작가들에 의해 상자로 오역된 것이라 이전의 기록에서는 항아리로 나타난다. 판도라의 항아리에 온갖 고통, 질병이 담겨있듯 우리 시팔도라의 항아리에도 재앙이 담겨있다. 그렇지만 이제 윤들도 나도 항아리 한 개가 전부인 세월을 벗어나 여러 항아리 중 하나로 시팔도라의 항아리를 볼 여유가 생겼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옆에서 ‘그래도 괜찮아’라고 토닥여주는 친구 하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온갖 치부와 재앙을 다 꺼내도 ‘오죽 궁금했으면 그랬을까’하며 깨진 항아리 조각을 같이 주워주는 친구로 내게는 윤들이 곁에 있다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시팔도라의 상자 아니 항아리를 열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4. 좋은 친구에 대하여]  

 - 아버지 못골의 글 보러가기 : 좋은 친구에 관하여 https://brunch.co.kr/@ddbee/28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우리, 봄을 보내고 만나자 https://brunch.co.kr/@ddbee/27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시팔도라의 상자 https://brunch.co.kr/@ddbee/29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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