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연가>
이해인 수녀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히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계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기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나는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를 참 즐겨 읽었다. 아마 그 시절만의 독특한 감성 트렌드였던 것 같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시집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도종완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었다. 누구나 앞 소절 한 부분은 다 암기하면서 다녔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난 유난히 예민하고, 사색적이었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철학적 질문들이 내게만 유독 크게 다가왔었다. 그때 그 시절 읽었던 이해인 수녀의 <해바라기 연가>는 사랑을 갈구하는 내게 '첫사랑'이라는 아련한 그리움을 대변해주는 그런 시구였다. 내게 있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내 사랑도 하나라는 신념과 믿음이 내면에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단순하고 순진했던 소년에게 '첫사랑'이란 문구만큼 가슴 뛰게 하고, 마음 설레게 하는 단어는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절친들과 '사랑과 우정'사이의 경계선을 넘나 들면서 사랑보다 우정을 선택하겠다고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생각도 대학교에 입학하고, 내 첫사랑인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https://youtu.be/gvOPLOCWvSc
남성적인 외모와 달리 그 당시 난 매우 내성적이고, 부끄러움도 많은 성격이었다. 지거국(지방국립대학교) 여초과에 입학한 후에는 나의 내성적 성격이 더 심해졌다. 한 학기 동안 동기 여학생들과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다. 특히 여학생들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것은 내게 있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때 즐겨 입었던 체육복 패선을 그대로 고집한 채 나는 신입생(freshman)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픈 얘기지만 그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체육 특기생'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난 패션 테러리스트(fashion terrorist)였다.
매일같이 데모와 최루탄으로 얼룩진 교내 교정을 보면서 나는 내심 대학생이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운동권 선배들이 대부분 과 학생회장이나 단대 학생회장직을 맡았다. 학생운동을 하지 않는 후배들은 비공식적으로 왕따를 시키는 문화도 은연중에 있었다. 그러던 내가 아내를 본격적으로 보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학과 세미나실을 들어갔을 때였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세미나실의 창문을 등지고 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단발머리에 큰 흰색 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그 여학생을 본 후 갑자기 가슴이 콩닥 뛰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한 채 세미나실의 한 모퉁이에 앉아 그 여학생을 흘낏 훔쳐보기 시작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내 마음속 한켠에 아내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과대표로 뽑혔다!
맵고 퀴퀴한 최루탄 냄새가 물씬했던 일학기도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데모로 인한 휴강도 많았지만 난 일학기 수업 대부분을 절친 한 명과 당구를 치면서 시간을 허비했었다. 그 친구와는 성격도 잘 맞았고, 대화도 잘 통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불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학기 과대표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의도치 않게 여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후원으로 과대표에 뽑히게 된 것이다. 여름방학 전 마지막 수업 날 동기들에게 당첨 소감과 함께 첫 번째 주어진 미션은 2박 3일의 여름방학 MT 진행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30명의 여학생과 10명의 남학생들 중 공교롭게도 10명의 남학생과 여학생이 MT 신청을 한 것이다. 과동기 남학생의 아버지가 거제도 OO공사 지점장으로 근무를 하셨는데 사택이 이층이어서 무료로 숙박이 가능하다는 답변에 우리는 거제도를 MT 목적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버스를 타고 충무를 거쳐 장승포에 도착한 우리들은 동기 아버지 사택으로 이동했다. 지점장이신 친구 아버지의 후덕한 지원으로 우린 맛있고 푸짐한 회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바닷가 인근이어서 어느덧 술자리의 분위기는 취기와 함께 얼큰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20명이 먹는 술자리에서도 당연히 설거지 당번은 과대표인 내가 당첨되었다. 술 게임이 시작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엇에 홀렸는지 한 명씩 한 명씩 짝을 지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9쌍이 모두 나가 버리고 남은 사람이 바로 나와 지금의 아내였다. 일단 우리 둘은 서로 눈치껏 설거지를 협업해서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가 끝나고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뭔가 가슴이 쿵닥쿵닥 뛰기 시작했다. 난 술기운을 등에 업고 난 그 여학생에게 등대 산책을 가자고 먼저 제안을 했다. 어느덧 내성적이고 부끄럼 많던 시골 소년은 사라져 버렸고, 술기운에 자신감 넘치는 호색한이 나타난 것이다.
등대로 이동하는 길에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서로 업어주는 게임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왜 굳이 '가위 바위 보'까지 하면서 업어주기 게임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내 말로는 내가 먼저 제안했다고 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50kg의 여학생이 78Kg의 거구 남학생을 업기란 사실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냥 업힌 시늉만 하면서 두발로 걸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대부분 업고 걸었던 것 같다. 많이 취했는지 가는 도중 길바닥에서 노상방뇨도 했고,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정신없이 대화를 이어가면서 우리는 등대로 향했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먼 등대 근처에서 동기들의 알 수 없는 울음소리도 크게 들려왔다.
아내는 바다를 참 좋아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우린 방파제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내가 먼저 깼다. 난 얼른 아내가 쓰러질까 봐 백허그를 했다. 난생처음 이성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등댓불에 비치는 솜털 뽀송한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심쿵이란 말이 그때 쓰는 말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은 온갖 나쁜 생각들 뿐이었다. 난 결국 악마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아내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렇게 부드럽고 매끄러울 수 없었다.
멀리서 동기들이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에 아내는 깜짝 놀라 깼고, 우리 둘은 아무 일 없는 듯 사택으로 돌아와 서로의 곁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깨어나 방 안을 둘러보니 혼숙(?)의 여파 탓인지 방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남녀가 취해서 뒤엉켜 누워 있었고, 방안은 전일 먹은 술 냄새가 가시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동기들을 모두 깨웠고, 아침도 못 먹은 채 우리들은 동기 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드린 후 다음 목적지인 몽돌해변으로 이동을 재촉했다.
몽돌해변에 도착한 우리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각자 자유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먹이를 찾아 헤매는 승냥이처럼 다시 바닷가로 모였다. 몽돌로 임시 캠프파이어장을 만들어 모닥불을 피웠다. 불길이 다시 타오르자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준비해 온 막걸리와 강냉이 안주를 자기 앞자리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어제 먹은 술도 아직 안 깬 상태라 막걸리 냄새를 맡자마자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여느 대학교 MT와 같이 취기가 오르자 난 준비해 간 기타를 꺼내서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과 민중가요를 치기 시작했고, 동기들도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내 옆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전일 아내와 있었던 야릇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아내의 표정을 흘깃 쳐다봤지만 아내는 타오르는 모닥불만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만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아픈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막걸리와 강냉이로 시작된 술판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짧은 MT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술만 먹으면 동기들 대부분이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남자든 여자든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을 지금까지도 보지 못한 것 같다. 또다시 하나둘씩 동기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모닥불도 수명을 다했는지 꺼져가기 시작했다. 술도 다 떨어질 시점에 연애 놀음도 지쳤는지 모두 다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또 나와 아내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밤이어서 파도소리가 크게 들렸고, 몽글몽글 예쁜 몽돌들이 또르르 파도에 쓸리면서 굴러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내 귓가에 들렸다.
둘이 남게 되자 난 어제 아내에게 몰래 했던 나쁜 행동에 대해 깊은 사과를 했다. 아내는 전혀 기억을 못 한다고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삼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처럼 우린 진지했다. 괜찮다는 아내의 말에 난 다시 용기를 내서 바닷가로 뛰어가 바닷물에 가글을 한 후 아내에게 다가간 후 키스를 했다. 생애 첫 키스였다. 바닷물로 가글을 한 이유는 막걸리 냄새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내 생애 첫 키스의 추억은 깊은 여름밤 몽돌해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키스를 한 후 아내가 내게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놓으라고 말이다. 100% 순순하고 풋풋하고 맘 착한 시골 소년에게 이 말은 정말 충격이었다. 가지고 놀다니? 갖다 놓으라고? 도대체 무슨 말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난 그런 남자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의 운명에 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숙소로 돌아왔고, 모두가 잠든 방의 한켠에 서로 몸을 가까이 기대로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가슴이 쿵쾅거렸고, 밤새 몸을 들썩였다.
날이 밝았다. 울음소리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거제도의 2박 3일 MT가 모두 끝났고, 우리들은 다시 대구행 버스로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난 과대표의 위치도 망각한 채 아내의 옆자리를 지켰다.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들은 각자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생애 가장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방안에만 앉아 있었다. 누우면 생각나고, 눈을 감으면 아내가 떠올랐다. 거제도에서 있었던 기억이 하루종인 나의 모든 생각을 지배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앓이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터질 것 같은 가슴앓이 열병을 일주일 내내 앓았다.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집전화번호도 모르고 집주소만 알고 있었던 난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생애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스고 찢기를 반복했다. 결국 보낸 손편지의 첫 내용은 이해인 수녀님의 <해바라기 연가>였다. '내 생애가 하나이듯 내 사랑도 하나이다'라는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의 답장 편지가 도착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도 나처럼 많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온 세상을 가진 듯 행복감이 밀려왔다. 몇 번을 읽기를 반복했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감정상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편지를 통해 집전화번호를 확인한 나는 전화를 걸었고, 내일 당장 만나자고 말했다. 그 해 남은 여름방학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와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첫사랑의 감정은 여름방학처럼 깊어만 갔다.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내 사랑도 하나입니다.
장교로 군대를 가기 전까지 4년 동안 나는 아내와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남들이 평생 만나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냈던 것 같다. 헤어지기 싫어서 ROTC 장교후보생으로 아내와 함께 대학 4년을 보낼 수 있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와 자주 만났다. 제대 후에는 고된 직장 새내기 생활로 아내에게 잠시 소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애정이 한 번도 식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27살에 결혼을 했다.
어떻게 보면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는 아내의 말처럼 파렴치한 놈이 안되려고 아마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건 명확히 아니다. 아내만큼 사랑할 여자를 평생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올해로 난 아내와 만난 지 33년이 되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우리 둘은 여전히 33년 전의 좋아했던 순수한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다. 흔한 권태기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사랑 때문에 서로 겪었던 가슴앓이의 농도만큼, 그리고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과 흔적의 깊이만큼 여전히 서로 간의 연애의 온도가 식지 않은 것 같다.
난 '100년 지기'라는 부부 밴드(네이버 밴드)를 만들어 아내와 보내는 모든 여정의 순간을 사진과 스토리로 남겨서 아내와 공유하고, 자주 추억을 곱씹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데이트하면서 찍는 사진에 뭘 그런 시시콜콜한 것도 다 찍냐며 핀잔을 주던 시크한 경사도 아줌마도 어느새 밴드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지 않겠는가!!!
누가 내게 어떻게 아내와 그렇게 오랜 연애감정을 가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말한 답변은 모든 인생의 해답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즉, 마인드셋(mindset)이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엔 '발전기'가 있다. 감정이 식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발전기를 가동해야 한다. 마음의 심쿵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발전기의 연료는 '추억'이다. 추억을 많이 만들수록 발전기를 계속해서 돌릴 수 있다. 심장을 뛰게 하면 연애감정도 뛰게 한다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그래서 난 휴무 때 절대 낮잠이란 걸 자 본 적이 없다. 휴일의 모든 시간을 아내와 데이트를 하면서 보낸다. 우리들의 시간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가끔 나는 술을 한잔 하면서 아내에게 묻는 말이 있다. "대학교 때가 좋아, 아니면 요즘이 좋아?" 아내는 망설임 없이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나도 만약 다시 사랑을 하겠냐고 물으면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라고 외치고 싶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사랑만큼 감정을 소모시키고, 심신을 지치게 하고 또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랑은 딱 한 번만 하면 되는 것 같다. 그것도 첫사랑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추억은 눈처럼 소복소복 쌓인다. 그렇게 쌓인 추억은 내 맘속의 발전기를 계속해서 돌리는 연료가 될 테니 말이다.
혹시 동기애와 전우애로 살고 계시는 부부가 있다면 오랜만에 발전기를 가동해 보면 어떨까요? 일단 추억의 연료부터 채우시길 바랍니다. 둘만의 뜨거웠던 옛 추억을 가슴 한켠에서 꺼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