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늦게 온다

by 이진무

소리가 늦게 온다

나에게 소리는 늘 늦게 찾아온다.


빗소리를 늦게 들어, 이미 옷이 흠뻑 젖고 나서야 비가 내렸음을 깨닫고,

봄의 소리를 늦게 들어 꽃구경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계절을 보낸다.


유성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그 별의 소리를 듣는다.

아이가 이미 떠나간 후에야, 그토록 애절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그 힘겨웠던 기침 소리가 들린다.


왜 그때는 듣지 못했을까. 왜 그 소리는 모두 지나간 후에야 내게 도착하는 것일까.


이제 내 여인의 사랑한다는 소리마저 듣지 못한 채 그녀를 멀리 떠나보낸다.


내 앞에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다.

추수가 끝난 논두렁은 참새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고, 나는 그 논둑길을 따라 힘없이 걷고 있다.

곧 싸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무너지는 내 가슴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소리 역시 모든 것이 끝난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삶의 소리를 놓치며, 늦게 듣고, 뒤늦게 후회하며 살아간다.




눈덮인 마을.jpeg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처음에 내가 잘 듣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크다고 아내가 소리쳐도 애매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봤습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구나, 생각해서 숨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내 어깨를 치고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고 묻길래 비로소 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주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저 불분명하게 들렸습니다. 병원에서는 난청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 비싼 보청기를 장만했습니다.


소리는 한결 잘 들렸지만, 이제는 너무 작은 소리까지 들려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밥 먹을 때 씹는 소리까지 다 들렸습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는 잠깐 보청기를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렇게 세상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들리지 않는 세상.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소문과 거짓들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증오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고립되어 무인도에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너무 무료해지면 다시 보청기를 꼈습니다. 거짓말처럼 무인도에서 도시 한가운데로 순간이동을 한 듯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리는 두 가지가 있는 듯합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와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입니다. 대개 동시에 들리기 때문에 구분이 잘되지 않지만, 귀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되자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소음과 진실한 소리 말입니다.


우리는 왜 늘 진실한 소리를 늦게 듣는 걸까요. 빗소리가 들릴 때 우산을 펴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들릴 때 사랑한다고 답하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그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의 귀가 너무 많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소문과 거짓, 증오와 질투의 소리가 진실한 소리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청기를 벗었을 때 비로소 편안해지는 것처럼, 때로는 세상의 소음을 차단해야만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한 소리가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소리를 놓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 계절이 바뀌는 소리, 누군가의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까지.


이제라도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세상의 소음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한 소리에 말입니다. 그 소리가 늦게 오기 전에, 아니 늦게 왔더라도 소리를 듣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황량한 벌판에서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산타 눈.jpeg


"하얀 눈처럼 맑고 따뜻한 마음이 여러분의 하루를 채우길 바랍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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