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명 ‘날씨 요정’이다. 내가 여행을 간 곳은 대부분 날씨가 맑다. 처음엔 억지로 우겨 만든 별명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함께 여행을 간 사람들이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흐렸던 하늘이 맑아지기도 하고, 비 소식이 있었던 날이 그냥 흐리기만 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딸아이는 내게 진짜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는지, 여행지에서 하늘이 흐리면 “엄마, 어떻게 좀 해봐”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물론 나에게그런 초능력은 없다. 그래서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내며 아이를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햇빛이 너무 강하면 살이 많이 탈 것 같아서, 흐리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원래 비 오기로 했는데, 우리 소풍 시간만 잠깐 멈춰달라고 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비가 올 때는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부침개 부쳐 먹기 딱이잖아. 그래서 비 좀 오라고 했지.”
워낙 말빨 하나는 기가 막힌 탓인지 딸아이는 갸웃거리면서도 결국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어떤 날씨든 최고의 날씨로 포장해내는 날씨 요정, 아니 날씨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웃긴 건, 말하다 보니 나도 점점 믿게 됐다는 것이다.
‘너무 쨍쨍한 날 수영하는 것보다, 흐린 날이 살도 안 타고 더 좋지 않아?’
‘빗소리 들으며 캠핑하는 것도 운치 있네.’
사실 모든 날씨는 그것 나름대로 좋은 날씨였다. 모든 건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걸, 나는 날씨 요정 노릇을 하면서 배웠다.
인생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무언가를 실수해 손해를 볼 때도, ‘이정도로 해결됐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몸 상태가 최악인 날엔 ‘아, 몸이 이제 슬슬 쉬라고 신호를 주는구나’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날들이 꽤 많다.
누군가는 이런 걸 ‘정신 승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뭐 어떤가. 뭐라도 이기면서 사는 게 낫지 않나. 그게 정신이라면 더욱 땡큐고.
어쩌면 기분이란, 먼저 선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늘을 어떤 날로 정할지, 먼저 결정하는 것. 좋은 날일 이유는 주변에 널려 있다. 비 오는 날에 맡은 싱그러운 풀냄새, 기대도 안 했는데 지하철에서 바로 난 자리, 동료가 건넨 따뜻한 커피 한 잔. 우리는 단지 그 작은 순간들을 못 보고 지나칠 뿐이다. 하루를 좋은 날이라 부를 근거는 사실 이미, 충분하다. 맑은 날만 좋은 날일 리 없듯이 모든 날은 다,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날씨 요정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날씨 요정 사기꾼이랄까. 그래도 ‘요정’이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분야니까. 열심히 해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