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육아가 나에게 남긴 것 2
살면서 내가 해낸 작은 성취들은 다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내 실패들은 나의 의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진단을 받기까지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평균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었다.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왜 너는 이것밖에 안되니?' 라는 생각이었으려나. 자신도 이유를 모른 채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붙들고 참 많이도 화를 냈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사회성이 좋아서 내 눈에도 예쁘고, 교우 관계도 좋은 아이들의 어머니들과 상담을 할때면 "어쩜 아이를 이렇게 잘 키우셨어요? 비결 좀 알려주세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도 그 땐, 그 비결을 알면 내 아이도 그 예쁜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클 것 이라는 생각을 했었나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 생각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지만.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은 그 존재만으로 너무 큰 상처였다. 엄마가 양육 스타일이 바뀌면 아이가 환골탈태를 하는 편집들은 '네가 그것밖에 안되니, 네 아이가 그런것이다.' 라며 나를 궁지로 몰았다. 아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키울 때에는 항상 찾아서 읽던 육아서도 아이가 진단을 받은 이후로는 '네가 변해야 한다. 너 때문이다.' 라고 손가락질 하는 엄격한 잣대같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희망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의 원인이 가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나 역시도 힘든 아이들의 원인을 직, 간접적으로 부모에게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는 더 애를 썼다. '나는 이렇게나 멀쩡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내 아이가 이렇습니다.' 라고 보여주고 싶었으려나. 그렇게 나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아이를 들들 볶았다.
지금도 이런 사회적 시선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아이와 관련된 인간 관계에서는 가정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호소하고 아이를 엄격히 단속한다. 그래도 진단을 받고 몇년이 흐르니, 이 아이의 어려움이 노력만으로는 극복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기다려 보기도 한다. 부담스러웠던 같은 반 아이들의 엄마들의 시선도 오래 곱씹지 않고 지나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만나는 부모님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생겼다. 유능한 교사는 못되어서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극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에게, 또 그 부모님들에게 '당신의 탓이 아닌 것을 내가 안다.'는 마음을 보낸다.
'엄마의 탓이 아니예요.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내가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