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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Nov 04. 2020

아무래도 등산에 입덕한 것 같아

등산을 좋아하게 된 이유 두 가지



등산은 본래 일 년에 한번쯤 여행 겸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도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한라산 한번은 죽기 전에 봐야지'라는 생각에 보게된 것이 한라산 백록담이고 북한산 둘레길을 왔는데 위로 오르는 등산객들을 보고 급 호기심이 들어 청바지를 입고 북한산 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럴싸한 목표의식은 없었다. 우연 혹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등산이다. 덕분에 평소에 동네 약수터도 힘들어하던 등린이는 울먹거리며 한라산을 올랐고 도 누가 안 힘들다고 했냐고 투덜대며 지리산을 하루에 두 번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큰 산을 하나 정복하면 등산의 쾌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일절 그런 것은 없었다. 한라산도 지리산도 북한산도 모두 정상에서 충분히 감동했지만 모두 결론은 동일했다. '다시는 안 와.'

내가 등산을 취미를 갖을 확률은 로또를 사지도 않았는데 일등에 당첨될 확률과 동일했다.

그런데 2020년 11월 현재 나는 무려 등산모임에 가입했다. 한달 새에 사패산, 인왕산, 응봉산(이건 산이라고 해야하나), 청계산을 다녀왔다. 심지어 혼자 아차-용마산 연계산행도 다녀왔다. 등산화와 등산복도 마련했으니 누가봐도 등산이 취미인 것이 분명하다. 로또를 사지도 않았는데 일등에 당첨됐나보다.

최근에 불량했던 식습관을 고치고 운동을 조금씩 시작하면서 체중도 대폭 감량하고 체력도 좋아졌다. 그러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취미로 운동 하나쯤은 갖고싶었다. 하지만 본래 운동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니 강제성을 부여해야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등산'이다. 사실 등산 모임에 가입하면서도 내심 '금방 탈퇴하는거 아냐?' 스스로를 믿지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적어도 올해는 계속 산을 탈 것 같다.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부쩍 즐거워졌다. 힘든데 재미있다. '힘든데 재미있다'는 일곱 글자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보면 내가 등산에 무려 '입덕'까지 하게 된 이유가 보인다.




병주고 약주는 질긴 끈기

조물주가 나를 만들 때 끈기라는 재료는 넣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블로그, 다이어트, 아이돌 덕질까지 그야말로 오만가지에 끈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등산'이다. 힘들면 관두면 되는 것을 관둔다고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 언제나 기어코 정상을 본다. 그렇다고 체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몇 달 운동을 했어도 하고싶은 운동만 골라 얍삽하게 하는 내가 산 속의 날다람쥐가 될 정도로 체력이 좋아질리가 없다. 남들보다 일찍부터 호흡이 목까지 차고 거친 숨소리를 낸다. 등산 모임 사람들은 '아차산 정도면 껌이지'라고 하는데 껌을 이렇게 숨가쁘게 씹나싶다. 그래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는다. 체력보다는 끈기에 가깝다. 이런 근성 덕분에 등산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도 사람들에게 '산 되게 잘 타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네? 그럴리가요. 질질 끌고 가는거예요. 나의 끈기는 당차게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힘들어 죽겠어도 늘어진 몸을 줄로 묶어 끈기라는 무언가가 힘겹게 끌고 나아가는 처절한 것이다. 포기하면 죽는 병에 걸렸는지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한다. 그것이 실망이 되든 뿌듯함이 되든.

다행인건 아직까지 산 위에서 실망은 없었다. 자욱한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던 백록담과 우연히 눈을 마주친 노루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었고 한라산의 내부가 그 위대함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지리산 노고단 정상 위에 서 있게 됨으로써 그 생각은 이른 착각임을 깨달았다. 360도로 펼쳐지는 장엄한 지리산자락의 규모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최근 다녀온 아차산은 능선부터 서울과 구리시의 탁 트인 풍경을 볼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뷰보다 인상적인 것이 있다. 바로 올라가는 코스에 있는 '범굴사'의 가을 풍경. 키도 덩치도 우직한 은행나무와 숱이 많은 단풍나무가 가장 진하게 물든 때였는데 그 속에 파묻혀있는 것 같은 작은 사찰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같았다. 거기에 스님의 목탁소리까지. '내가 등산을 좋아하게되더니 이제 꿈에서도 산을 오르나?' 끝까지 현실임을 잊지 못할 풍경이다.

이렇게 매년 질긴 끈기 덕분에 산에서 만나는 인생 풍경이 늘어난다.


이미 등산이 취미가 될 운명이었을지도

'나는 운동이 싫어'라고 결론짓기 전, 여러 운동들이 두 가지 기준에 걸러졌다. 첫번째는 '나는 움직이는데 풍경이 바뀌지 않는 것은 거절'이라는 기준인데 여기에서 헬스장에서 하는 여러 운동, 테니스, 수영, 배드민턴 등 대중적으로 즐기는 여러 운동이 버려진다. 운동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일정 틀 안에서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느린 운동'도 거절이다. 여기에서 요가와 필라테스 등이 또 걸러진다. 성격이 급해서 바로바로 동작이 연속되지 않으면 답답해서 토할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남는 운동은 정말 몇 개 안된다. 등산과 조깅 정도? 내가 운동을 취미로 갖는다면 등산이 될 확률은 종목을 고민하기 전부터 반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등산은 내가 어느 산으로 가냐에 따라 산 속에서도 어느 길로 가냐에 따라 계속해서 풍경이 바뀐다. 심지어 길도 암벽 계단 흙길 등 변화무쌍하다. 때때로 개척자가 된 기분이다. 새로 만나는 것은 비단 길뿐만이 아니다. 아차산 때처럼 목적지는 정상이지만 가는 길에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번 어느 산을 올라가봤더라도 갈 때마다 다른 것이 등산이다. 오르는 사람도 컨디션에 따라 힘들수 생각보다 가뿐할 수도 있다. 그렇게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과 다를 바가 없다. 같은 곳도 언제 가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느낀 점이 다르고 내가 어느 쪽으로 가냐에 따라 풍경이 바뀌니까. 등산이라는 행위 자체가 여행과 알멩이와 같다.




설악산에 첫눈이 관측됐다고 한다. 달력은 십일월이 시작됐다. 곧 겨울이라는 소리다. 어쩌면 등린이에게는 비수기일 수 있는 고비의 계절인데 새로운 계절동안 얼마나 또 어떤 방식으로 산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지 스스로도 기대된다. 우선 더 추워지기 전에 십일월은 부지런히 산에 오르자. 이제 정상 위에서 여유롭게 김밥 먹는 것은 감기 걸리기 딱 좋은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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