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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Feb 19. 2021

저는 올해 계획을 깨는 것이 목표입니다

남들은 계획을 지키는게 목표이지만 나는 반대로 계획을 부수는게 목표다

물론 맹신하지 않지만 삼 년 전부터 mbti는 항상 INFJ다. 학생 때부터 계란 한 판을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버킷리스트 없이 맞이한 새해가 없다. 정돈되어있는 공간에 심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휴대폰 속 캘린더 앱과 메모장은 단 한 번도 비워진 적이 없다. 갑작스럽게 '야 나올래?' 번개를 치는 것도 중간에 누군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가장 기분이 다운되는 일 중 하나다. 가지고 있는 떡메모지도 죄다 계획표다.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 준비돼야 안정적으로 숨을 쉴 수 있는 프로계획러다. 계획성이 푹 며칠을 끓인 엄마표 미역국만큼이나 깊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변수 없는 삶을 지향해온 덕분에 얻은 것은 꽤 많다. 지인들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성실하다는 얘기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고 남들은 귀찮아하는 것을 일주일 전 하루 전 혹은 오 분 전 미리 계획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항상 늦어도 약속 시간 십분 전에는 스탠바이하고 자고 일어나면 바로 이불을 개고 일주일에 한 번은 화초를 챙겨주고 계절이 바뀔 때쯤 옷장 정리를 싹 해준다거나 쓰레기는 바로바로 치우고 분리수거를 주기적으로 하는 등 별 거 아니지만 그 사람의 성향을 짐작하기 딱 좋은 것들 말이다. 해마다 쓰는 버킷리스트들의 성공률도 70% 이상이다. 하지만 최근 이 성격에 불만이 생겼다. 아무도 뭐라 안 했지만 스스로 시위에 나섰다.


스트레스만 주는 프로계획러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항공권 한번 취소해봤으면 계획을 안 세울 만도 한데 사람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여즉 체크리스트를 달고 산다. 내일 먹을 아침 점심 저녁, 돌아오는 주에 해야 할 일들, 여전히 빼곡한 캘린더 앱, 매일 체크해야 하는 루틴들. 나를 기준으로 주위에 깔린 모든 것이 계획표다. 작년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올해 여러 계획을 추가했다.

'하루에 물은 1.5L 이상 마셔야 하고 매일 일기를 쓰자. 책도 한 페이지 이상 꼭 읽어야 해. 매일 영어 문장도 이 만큼 외우고 운동은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먹을 때는 과식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생채소랑 곁들여서 먹자. 격주로 카페 콘텐츠도 써야 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들도 챙겨줘야지.'

계획표대로만 움직여도 하루가 갈 정도로 방대한 양의 '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 이렇게 목표지향적인 삶이 한두 해가 아니었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모든 목표가 집에서 이루어지면서 이런 계획들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지겨운 것이다. 매일 같은 일상 반복되는 목표. 목표라기보다 해야만 하는 일에 가까운. 이런 하루하루에 스트레스를 받게 됐고 그 결과는 기분이 태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매사가 짜증이 가득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막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태생이 배낭여행자였던 나에게도 호캉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애프터눈 티도 먹고 눈 비비며 호텔 조식도 과식하는 그런 느긋한 호캉스. 심지어 호텔 안에는 해야 하는 일도 없지 않은가. 가격 빼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바인 공간이 틀림없다. 


계획표가 있어도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포기하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프로계획러 성격에는 사은품이라도 있는지 끈기도 붙어있다. '아 스트레스받아! 눈물 나겠네 진짜' 툴툴거리면서도 의자에 앉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펼친다. 씩씩대고 스스로 불행함을 느끼면서 실행한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쓰면서 '내참 그냥 안 하면 되지. 뭐 하는 거람' 피 식대며 쓰고 있지만 계획이 세워지면 바로 뭐에 묶여있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생각하기도 전에 하면 꾸준히 할 수 있다고 했어'라고 이미 하기 싫다는 생각을 시작했으면서 어디서 본 명언을 되뇌며 한다. 생각하기도 전에 실행에 옮기면 정말 하게 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스트레스까지 안 받는 것은 아니더라. 안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에는 고스란히 누적된다. 그리고 이내 경고음을 삐용삐용. 번아웃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까지 쉼 없이 달렸을까-왠지 부끄러워 함부로 그렇다고 쓰고 싶지 않지만 증상이 동일하다.

계획이 세워지면 억지로라도 한다고 하니 그럼 계획표는 안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안 써봤다. 그랬더니 무기력증이 찾아오더라. 바쁘지 않으면 잡생각이 많아지는 타입이라 온갖 우울한 생각을 다 끄집어내길래 빠르게 관뒀다. 에라이~


그렇게 나의 성격과 수차례 협상을 시도하고 결렬을 반복한 끝에 하나의 타협점을 찾았다. 대부분의 계획을 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계획표는 써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그래 그건 넘어가겠지만 지키기 싫은 것은 과감하게 안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남들은 계획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연초이지만, 나는 반대로 계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쓰는 오늘의 다짐에 '차근차근'이라는 단어를 매일같이 쓴다. 다 안 지켜도 되니까 차근차근 하나씩 하고 싶은 것부터 하자.  매일 할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나를 검열하게 했던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책이 읽고 싶지 않은 날에는 '오늘 뉴스레터를 많이 읽었으니까' 대체한 것이 있다며 그냥 잠자리에 들고 물 한 잔쯤 덜 마셔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 게을러 보여도 '괜찮아-그래도 괜찮아' 주문을 외우고 있다. 이렇게 한동안 계획을 부수다 보면 또 하나씩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이렇게 잠시 생각 없이 지내도 나는 반드시 태생 프로계획러로 돌아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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