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
"빨리 걸으라고!"
일곱 살 오빠는 다섯 살 꼬맹이의 뒤에 따라오며 재촉했다.
오빠와 나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아침에 등원 준비로 바쁜 엄마에게, 남동생으로 바꿔달라고 오빠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렸다.
다섯 살 꼬맹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나는 매일 아침 앙심을 품었다.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가라!'
다음 해.
오빠는 어엿한 국민학생(초등학생)이 되었고, 난 아직 명덕유치원 병아리반 꼬맹이다.
그날도 나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빠는 등을 다 덮는, 1학년에게는 버거워 보이는 남색의 사각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갔다.
배가 아프다는 핑계도 잊고, 야옹이 인형을 가슴에 안은 채 도미노 조각을 온 집안에 깔아놓기 시작했다.
어느새 오전이 다 지나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급기야 폭우가 쏟아졌다.
엄마는 오빠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온 엄마는 사색이 되었다.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겁이 났다.
지난날 내가 품은 앙심 때문에 오빠가 돌아오지 못하나 하는 생각에 점점 불안해졌다.
다행히 조금 뒤 처음 본 아저씨가 길 모퉁이에서 울고 있었다며, 오빠를 데리고 왔다. 그날처럼 오빠에게 미안한 날도 없었다. 나는 사과의 마음을 담아 아끼고 아끼던 밀크캐러멜 다섯 개를 오빠의 파란색 필통에 넣었놓았다.
짧지만 굵었던 오빠와의 첫 번째 이별은 우리 가족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쯤 후.
오빠와의 두 번째 이별이 찾아왔다. 오빠의 군입대.
나는 세상을 잃은 듯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친구들은 좋은 일에 웬 눈물이냐며 복 달아나서 오빠가 다시 올 수도 있다고 놀렸다.
실제로 한 친구는 군에 간 오빠가 평발이란 이유로 다시 돌아왔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복도 지지리 없다며.
오빠가 입대하고 한 달쯤의 시간이 흘렀다.
오빠의 찢어진 사복이 소포로 왔다.
엄마와 나는 절망에 오열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늦은 오후 퇴근한 아빠의 설명에 우린 곧 안정을 찾았고 오빠의 안녕을 바라며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가 육군 하사로 멋지게 제대하던 날.
군에 간 오빠를 그리워하며 눈물바람을 했던 난 종로에서 이상한 오징어와 잊지 못할 소개팅 중이었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앞니가 부러졌다는 그 친구는 이른 나이에 벌써 이마와 머리의 경계가 모호했다.
게다가 잘난척하는 꼴불견이었다.
만나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먼지가 되고 싶었지만,
먼지보다는 몰래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치마만 두르면 좋다던 오빠가 지금의 새언니를 인사시키던 날, 오빠와의 세 번째 이별은 예고되었다.
오빠는 가끔 철없지만 충실한 가장이 되었고, 엄마 아빠의 뒤안길도 잘 보듬는 든든한 장남이기도 했다.
오빠는 천복을 타고났는지 20년 전 사뒀던 재계발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선다.
완공까지 8년이 남았다.
칠순을 4년 남기고 입주하게 된다.
아직 먼 일이지만 살짝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20 년 전 새 아파트에 들어갈 때 오빠는 마음껏 축하해 줬었다.
선인들의 말씀대로 형만 한 아우는 없는 걸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