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아직도 덥다.
장정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피아노를 끌고 온다.
"어휴~~ 왜 이리 무거워?"
"안에 돌 들은 거 아냐?"
산책 중인 나는 멍하니 피아노를 쳐다봤다.
"버리시는 거예요?"
"네!"
찢어진 소파, 손잡이가 떨어진 서랍장, 낡은 선풍기... 고개를 떨군 누리끼리한 피아노는 버려진 물건들과 함께 엉거주춤 서있다. 두어 시간쯤 지났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은 듯한 새초롬한 피아노가 우리 집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5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 친구의 이름은 오늘부터 흰둥이다.
흰둥이보다는 누렁이 쪽에 더 가까운 오래된 흰색 피아노. 아무리 닦아도 짙게 스며든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구석구석 먼지도 닦고 조그마한 액자도 얹어 놓았다.
흰둥이는 그 방의 물건들과 어색한 인사 중인가 보다. 나는 슬그머니 문을 닫아주었다.
문화원에서 피아노 레슨을 했었다. 코로나 때 문화원은 문을 닫았다.
어느 날 집 앞 슈퍼에서 아는 분을 만났다.
"피아노 선생님!"
"어머니! 건강하시죠?"
"선생님! 저 피아노 더 배우고 싶어요."
흰둥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된 발단이었다.
정들었던 분들과 다시 만나고 싶었고, 수업을 하자면 피아노가 한 대 더 필요했다.
바람이 차다.
늦가을이다.
바쁘게 흘러가던 시간도 진한 땡볕에 잠시 졸고 있다.
그해 가을은 길가에 나뒹구는 낙엽도, 때 부리는 동네 꼬맹이도 사랑스러웠다.
70세의 화가 선생님, 은퇴하신 수간호사 선생님,
옆동의 골드미스 경숙 씨... 이 분들과 다시 만나게 해 준 고마운 흰둥이.
가끔 흰둥이에게 "오늘도 수고했어. 고마워!"
하며 쓰다듬어 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는 흰둥이.
'건방져!'
흰둥이를 만난 지 두 해 하고도 반이 더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흰둥이의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거 같다.
하지만 정이 듬뿍 들어버린 흰둥이를 다른 피아노로
바꿀 수는 없었다.
삐그덕 거리는 건반도 하나 둘 생겼다.
나이가 들면 부실한 이가 빠지는 거와 다르지 않다.
오래 함께하기에는 어렵겠지만 흰둥이와 나눴던 따뜻한 마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밤새 눈이 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다.
아쉬운 시간이 하릴없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