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딩동 딩딩"
피아노의 흰건반을 박자에 상관없이, 투박한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내리 찌른다.
이 남학생은 본인의 말씀을 빌리자면, 방년과 향년사이를 오가는 82세 갑수 씨다.
몇 달 전, 아파트 담장에 노오란 개나리꽃이 도란도란 모여 피고, 건물 옆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는 목련나무에서 마슈멜로 구운 향이 날 때쯤이었다.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망설이다 무심결에 받았다. 연배가 느껴지는 남자분의 목소리.
"지가 나이가 많은디 피아노 배울쑤 이쓰까유?"
새로운 학생을 받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연세가 많으신 분이어서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그럼요!"
왜 그랬을까? 말하는 순간 바로 후회했다.
그다음 주부터 갑수 씨와 나의 고된 음악수업이 시작되었다. 굳어진 손가락 관절과 돋보기 너머로 어슴푸레 보이는 음표와 숫자들.
잔뜩 힘주어 올라간 어깨 근육이 갑수 씨의 긴장감을 말해주는 듯하다.
갑수 씨와 만난 지 벌써 두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지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전 10시 5분 전.
거실 창을 뚫고 들어와 길게 누워버린 햇살의 나른함에 눈꺼풀마저 살짝 내려앉는 순간 현관벨이 사정없이 울렸다.
레슨시간에 단 한 번도 늦지 않고 항상 5분 전에 도착하는 모범생 갑수 씨.
힘든 내색도 한 번 없이 오롯이 악보에 집중하시는 모습은 한창때의 젊은 친구들이 본받아야 할 정도였다.
오늘은 드디어 불후의 명작 나비야를 레슨 받는 날이다.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관절로 온 힘을 다해 솔(5번 손가락), 미(3번 손가락) 음을 박자에 전혀 상관없이 내리꽂는다.
삽질 백 번 보다 나비야가 더 힘들다 하시며 웃는 갑수 씨.
평생 농사를 짓느라 험해진 손을 하얀 건반에 올려놓기 민망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열정은 불가마에 참숯을 1톤쯤 만들기에 충분했다.
80 평생을 사시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시다는 갑수 씨.
레슨날에는 목부분이 하얗게 해진 깨끗한 연회색의 점퍼를 입으시고 빨간색 마을회관 모자를 쓰신다. 반들거리게 광을 낸 갈색구두에 백색 양말을 신고 오시는 젠틀한 갑수 씨.
등은 이미 땀으로 옴팍 젖어 있었고, 얼마나 기를 쓰며 연습하셨는지 다리도 살짝 휘청하신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피아노를 가르친 이후로 이렇게 나비야를 어렵게 깨우친 학생은 갑수 씨가 처음이었다.
'망할 나비야!'
나비 잡으려다 사람 둘을 잡을 뻔했다.
왼손은 아직 배우지도 못했는데.
이른 점심을 먹고 거실창을 열어 환기를 한다.
이젠 제법 공기가 따뜻하다.
나는 어느새 집을 나와 한강을 걷고 있다.
앞산의 나무들이 벌써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런!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귀에 익은 아바의 댄싱퀸 노랫소리. 나의 벨소리다.
'갑수 씨가 왜 전화하셨지?'
"슨상님! 할멈한테 나비야 치줬더니 좋다고 계속 치보라고 혀서 죽겄써유! 하하하"
"슨상님! 다음 시간엔 왼손두 허지유?"
갑수 씨의 나비야는 이미 원래 박자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고, 이제 갑수 씨만의 나비야가 되어버렸다.
'왼손은 어떻게 가르쳐 드리지?' 겁이 덜컥 났다.
꿈에서도 오선지에 나비들이 뛰어다닐 것 같았다. 입시레슨만 30여 년을 했다.
그 어려운 곡들보다 나비야가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느려진 걸음에 얕은 한숨이 섞인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없는 나비들은 마냥 신이 나서 나풀거린다.
나비야 나비야 이 리 날아오지 말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도 추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