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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마당

by 여름나무


무더운 여름.

장독대의 항아리도 뙤약볕에 지쳐 늘어져 보였다.

마당 한편 작은 연못, 물고기 몇 마리의 느릿한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

내리꽂아지는 햇살은 깊지 않은 연못을 뚫을 기세다.

은행나무 아래, 손재주 없는 아빠가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평상이 하품하며 늘어져 있다. 어린 내 눈에도 아빠의 평상은 편안히 쉬기엔 좀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평상이 좋았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판때기들이 재밌어 그 위에 크레파스로 어설픈 클로버, 하트, 별을 그려 넣었다.

아빠의 작은 마당은 나와 우리 집 멍멍이 해피의 놀이동산이 되었다.

우리는 날벌레를 쫓아다니며 온 마당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올라온 들꽃이 신기해 쪼그려 앉아 젖내 나는 콧김을 뿜어내며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참을 놀다 지쳐 목이 마르면 펌프가 있는 우물가로 달려가 햇빛에 반짝이는 물로 목을 축인다.

은행나무 그늘 밑에서 더위에 지친 우리를 항상 기다려주는 아빠의 평상.

우리는 그 위에 쭉 뻗어 누웠다.

땀내가 뒤범벅인 채로 까무룩 잠이 든다.


어느덧 오후 햇살이 누렇게 진해지고, 아침저녁으로 살랑거리는 서늘한 바람이 더위로 지친 몸을 토닥여주기 시작한다.

하루.

이틀..

.

.

.

은행잎이 노랑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할 즈음.

엄마는 마당 한가운데 연탄화덕에 불을 지폈다.

고추장 양념 삼겹살을 석쇠에 굽는 냄새는 옆집 느림보 고양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담을 넘게 만들었다.

앞니가 빠진 나는 오빠보다 많이 먹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해피도 한 조각씩 얻어먹는 고기가 싫지 않았나 보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구운 고기향과 섞여 콧속으로 들어온다. 실컷 먹어 뽈록 올라온 배 위에 손을 얹고 평상에 누웠다.

하늘이 파랗다.

엄마와 스케치북에 그렸던 하얀색 구름이 하늘에도 그려져 있다. 해피는 아까부터 잠이 들었다.


찬바람이 조금씩 우리 집 마당에도 찾아왔다.

어느새 은행나무는 마당을 노랗게 물들였고,

해피와 나는 아빠가 잔뜩 모아놓은 은행잎을 덮고 뒹굴거렸다.

엄마의 날카롭게 혼내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우리는 못 들 은채하며 마냥 신이 났다.


해가 뉘엿해지면 녹이 슨 대문이 삐그덕 거리며 열린다.

아빠다.

나는 아빠의 평상에서 자는 척하고 있다.

아빠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낙엽을 모아 태운다.

낙엽을 태우는 향에 취해 자는 척하다가 잠이 들어버린다.

부엌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에 눈이 떠졌다.

분명히 평상에 누워있었는데 깨어보니 엄마가 아끼는 소파 위였다.

아까워서 엄마는 앉지도 않는다. 아빠는 "앉지도 않을 걸 뭐 하러 샀지? 껄껄껄" 하며 엄마를 놀렸다.

마당의 나무도 앙상해지고 창문틈에서는 바람 들어오는 소리가 제법 들렸다. 따뜻한 온돌방이 반가운 건 날씨가 추워지고 있는 거겠지. 우리 집 마당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코끝에 찬기운이 느껴지는 날이다.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나를 부르는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기 싫다.

꼭 감은 두 눈이 순간 번쩍 떠졌다.

"아가! 눈 온다."

태어나서 몇 년째 보는 눈인데 볼 때마다 신기하다.

장독에도 마당에도 폭신하게 쌓인 눈은 엄마의 카스테라보다 달고 맛났다. 나는 항아리 뚜껑에 조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었고, 아빠와 오빠는 마당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커다란 눈사람이 조금 생경스러워 선뜻 친해지기 어려웠다.

살위 개구쟁이 오빠는 어른스럽게 아빠를 도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괜히 샘이나서 관심 없는척하며 입을 삐죽였다.


다 만들어진 눈사람.

얼굴이 무서웠다. 해피 등에 올라타고 새침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한일자의 꾹 다문 입술과 위로 쭉 찢어지듯 올라간 양 눈.

엄청 큰 주먹코. 어디 하나 수더분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콧대 높았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워졌고 날씨에 따라 조금씩 녹았다. 처음의 기세 당당했던 모습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었다. 그제야 눈사람이 만만해졌다.

눈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매서운 찬바람은 힘을 잃어가고, 눈사람도 지저분하고 커다란 솜뭉치로 변해버렸다. 서운한 마음도 잠시, 담장을 두르고 있던 성질 급한 개나리는 철없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장대같이 서 있던 목련나무는 솜털이 보송한 몽우리를 만들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마당에도 봄이 도착했나 보다.

그새 나는 한 살을 더 먹고 지난겨울에 아래 앞니도 하나 더 빠졌다.

장독대의 항아리 사이로 이름 모를 연한 풀들이 올라오고, 담벼락 아래에 작은 민들레들이 조그맣게 군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아직은 싸늘한 초봄의 일요일.

아빠는 겨우내 추레해진, 누가 봐도 웅덩이 같은 연못을 청소했다.

곧 물고기 몇 마리가 이사 오겠지.

손재주와는 거리가 먼 아빠는 봄맞이 마당을 만든다고 하루 종일 분주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겨우내 방치된 평상을 수리하고, 장독을 닦아놓고, 삐뚤빼뚤한 징검돌을 손보곤 했다. 평상을 수리한다고 해도 망치 소리만 요란했고, 손을 망치에 다쳐 붕대를 감기도 했다. 장독을 닦다가 뚜껑을 깨기 일쑤였고, 징검돌은 똑바르지 않아 걸려 넘어질 때도 많았다. 우리 집 마당의 봄치장은 아빠의 불타는 의욕과 엄마의 불안한 마음이 함께 시작을 알렸다. 그 후로도 5, 6년을 그 집에서 살았다.

개구쟁이 오빠는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고, 나는 말괄량이 꼬마숙녀가 되었다.

지금은 아빠의 평상도 엄마의 연탄화덕도 해피도, 옆집 느림보 고양이도 없지만, 그때의 추억은 삶에 지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달콤한 막대사탕이 되어주었다.


거실 창을 열었다.

후끈한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눅눅하다.

햇빛에 바짝 말린 시원하고 바삭바삭한 엄마의 이불홑청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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