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아파트 산책길에 있는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열렸다.
오전 11시가 넘은 시간.
신랑과 함께 아침 겸 점심으로 수제비와 비빔밤을 먹으러 다녀오는 길이다.
초록의 대추는 어젯밤에 내린 폭우에도 잘 버텨냈다.
아주 작은 대추도 있었지만, 알밤만 한 대추도 있었다.
이맘 때면 아빠는 아침 산책길에 대추 몇 알을 들고 들어오셨다.
어느 집 담 너머로 늘어진 가지에서 따 오셨겠지.
대추가 점점 단내를 머금을 때쯤이면, 어스름에 익어가는 노을도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가 중2쯤이었던 거 같다.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길 모퉁이집.
그 집에도 뜨거운 여름볕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었다.
짧은 머리, 근육질의 가슴, 굵은 목선, 울끈불끈 한 팔뚝, 눈빛은 이글거리는...
나는 안보는 척하며 낮은 담을 넘어 가자미눈이 될 때까지 힐끔거렸다.
그는 잘 나가는 고교 야구선수였다.
남자의 단단하고 굵은 팔뚝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던 거 같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팔뚝에 툭 불거진 핏줄에 매력을 느꼈다.
탄탄해 보이는 핏줄은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튕겨 나올 듯했다.
곁눈질 몇 번으로 나의 이상형은 정해졌다.
'남자는 역시 핏발 선 쫀득한 왕팔뚝이지 !'
대학 팀으로 스카웃이 되었다는 둥, 실업팀과 이야기 중이라는 둥.. 좁은 동네에 왕팔뚝의 소문이 무성했다.
가끔 보는 모습이지만, 그는 마당에 있는 샌드백을 터질 정도의 소리를 내며 발로 찼다. 굳이 웃통까지 벗고.
새초롬한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거리며 모퉁이를 돈다.
비슷한 나이인데 비리비리한 샌님 같은 우리 오빠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가을 해가 쨍하다.
엄마가 평상에 널어놓은 고추가 말라가고 있는 건지 시들어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대문 벨이 울렸다.
옆집 아주머니다.
“엄마 계시니?”
나는 마당에서의 긴 수다를 모른척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우리 집 강아지 해피와 괜히 친한 척을 했다.
“대추나무집 아들 유명한 고교 야구 선수래!”
“그 집 엄마 어깨 부러지겠어! 얼마나 잘난 척을 하는지.”
동네 사람들 다 아는 이야기로 뒷북을 친다.
우리 집 해피도 아는데.
엄마는 웃고만 있다.
그 집의 커다란 대추나무 때문에 사람들은 대추나무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슬그머니 내방으로 들어갔다.
‘운동선수와의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앙큼하게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거 같다.
2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이다.
다음 주에 피아노 콩쿨이라 연습도 해야 하는데...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종종걸음으로 모퉁이집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집 앞에 커다란 트럭이 길을 막았다.
아저씨 두 분이 허드렛짐을 들고 나온다.
몇몇의 동네 아주머니들은 다 들리게 수군거리고 있다.
“아버지가 도박빚이 어마했데!”
“보증도 섰다는데?”
다음날 그 집에는 새로운 대추나무 주인이 이사를 왔다.
“어디로 이사를 갔나?”
“아이들은 인천 고모집으로 보냈다는 거 같더라구요!”
저녁 식사 때 엄마와 아빠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대추나무집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은 빛보다 빠르게 지나 지금 나는 60을 바라본다.
손아귀의 대추 서너 알로 나를 웃게 해 주셨던 아빠도 자연의 일부가 되신 지 3년이 되어간다.
그 시절의 야구 유망주는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의 이상형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지금 나의 곁엔 누구보다 매끈하고 뽀얀 팔뚝의 곱상한 남자가 있다.
비가 더 오려나?
제습기를 틀어놔도 뽀송하지 않다.
후덥 한 더위가 지나갈 무렵 아빠의 기일이 다가온다.
대추가 영글기 시작할 때쯤이면 아빠 생각이 더 난다.
다음 주에는 아빠를 만나러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