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심도 있는 나를 찾게 해 준 두 번째 기사님
택시는 주로 병원에서 집으로 갈 때이용한다. 항암 후 고되어진 몸으로 대중교통의 고단함까지 짊어지고 갈 수 없어서 원무과에서 병원 결제를 마치고 나면 얼른 카카오 T 애플리케이션을 켜 택시를 호출한다. 예상 결제 금액을 보고 차가 막히는지 가늠하는데 이날은 사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표시되었다. 곧이어 예약한 택시가 왔고 나는 축 늘어진 모습을 한 채로 탔다. 탑승을 하자마자 택시 안 쾌쾌한 담배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콧잔등을 꾹꾹 눌러 마스크를 최대한 코에 밀착시키며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으로 기사님에게 말했다.
"기사님. 고속도로 길로 가주시겠어요?"
외형으로 보건대 기사님 나이는 사십 초반대. 택시 안 찌든 담배 냄새 하나로 상대를 쉽게 판단했고 이내 기사님의 인상이 험상궂은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고속도로 길로 가 달라는 나의 말에 기사님은 원래부터 고속도로 길로 가려고 했다면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변했다. 몸도 힘든데 택시로 마주친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의 사정은 모른 채 고요 속에서 빈정이 맴돌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는 사이 눈을 감고 있는 정도로 잠깐잠깐 눈을 붙였다.
한편 병원에서 집까지 막히지가 않으면 5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지만 도로가 정체되는 순간부터는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기존보다 두배로 늘어난다. 고속도로 사정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5분, 10분 빨리 도착하고 싶어 택한 길이다. 비록 결은 다르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손님을 태워야 하는 택시 특성상 기사님도 빨리 도착하길 바라는 맥락에서는 나랑 같았다. 그러나 처음 택시를 잡고 예상 금액을 보는 순간부터 알지 않았는가. 도중에 퇴근시간이 겹치니 소요 시간은 더 늘었고 기사님은 구시렁대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막혀. 죽겠네 진짜."
상황이 답답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었고 기사님은 밖으로 소리 낸 것의 차이일 뿐. 기사님은 계속해서 '하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내게 현금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통에서 지폐를 꺼내며 통행료를 지불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도 도로 정체가 여전했다. 갑자기 기사님은 “이쪽으로 빠지면 안 되나요?”하고 물었다. 그 길은 차들이 정체 없이 한 번에 쑤욱 빠지는 구간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길은 하나로 통하기 마련이겠지만, 나도 길을 잘 모르는 데다 괜히 집에 도착하는 시간만 더 늦어질 것 같았다. 길을 바꾸려는 일촉즉발 상황에 그 길로 가면 돌아갈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안 된다고 답했다. 기사님은 가던 길로 갔으나 점점 더 깊은 한숨을 쉬다 한마디 하셨다.
“여기 길 원래 이렇게 막혀요? 고속도론데 말도 안 되네.”
막힐 때는 무료 도로랑 큰 차이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내가 아는 길이 보였고 여기서부터는 길 안내를 해드릴 수 있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기사님! 지금 우측으로 빠지세요. 그럼 차 안 막히고 여기서부터 저희 집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기사님은 다행이라고 하면서 온화한 어투로 변했다.
“아 실은요. 배가 너무 아파서 상황이 답답했어요. 꽉 막혀서 빠질 수도 없는데 화장실은 가고 싶고 미치겠더라고요.”
나는 그제야 기사님의 한숨과 방향을 틀고자 했던 것들이 이해되었다. 택시를 탔을 때부터 어딘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아마도 배가 그때부터 살살 아팠을 것이고 화장실을 갈 수 없는 도로에서 심리적으로 배가 더 아프며 난처하셨을 것이다. 나도 적잖게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충분히 알아서 말했다.
"에고.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조금 가라앉았다고 했다. 이후로 도착지까지 십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는 짧게 대화를 했는데 기사님은 혹시 택시비를 현금으로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1원도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에서 현금을 물으니 내 머릿속은 계좌이체가 떠올라 물었다.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입금해 드릴까요?”
기사님은 고개를 저으시며 간단하게 말했다.
“요즘 손님들이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죠. 사실은 제가 개인 회생 중이라 카드도 없고 계좌도 없어서 현금으로만 써요. 아까 통행료를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집으로 가려면 통행료를 또 내야 하니까 저녁밥 사 먹을 현금이 없을 것 같아 혹시나 여쭤봤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ATM기기에서 뽑아서 드려야 하나 찰나에 고민했지만 내 몸이 우선으로 거기까지 닿을 넓은 아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평소 배고픔의 욕구를 인내하기 힘든 나로서는 연민의 눈길로 물었다.
“식사를 못하시게 되면 집에 가서라도 챙겨드세요. 아! 원래 여기 근처에 기사식당 있었는데 없어진 지 좀 됐네요.”
기사님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 대해 말했다.
"집가봤자 반겨주는 사람 없어서 밖에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야지, 안 그러면 외롭고 쓸쓸해요. 기사식당도 요즘에는 물가가 많이 올라서 싸지가 않아요. 한 끼에 만원은 있어야 해요. 어차피 그 병원 부근이 제 동네라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 손님 태워 가면서 현금 있으신지 물어보죠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여기서 내리면 된다고 말하며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생각이 스치고 간 대화였다. 배가 아픈 택시 기사의 초조한 모습부터 혼자 밥 먹는 장면, 고물가 시대 체감 등등. 그 가운데 집에 들어갔을 때 반겨주는 사람 없다는 말이 물고기를 낚아채듯 마음에 걸렸다. 기사님은 어떤 사정을 거쳐 개인 회생에 이르렀을까. 단순히 남 이야기가 궁금해 속닥속닥 거리기 위함이 아니다. 회생 절차를 밟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기사님. 그 순간에 더 나은 세상에 대해 허구했다.
살며시 기사님에게 파산, 개인 회생보다 더 힘든 건 세상의 시선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전에 회생 절차 밟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들은 적 있었다. 돈 펑펑 써놓고 나중에 갚을 능력 안되면 채무 싹 갈아엎는 사람들 뭐 그런 파렴치한 인간 유형으로 언급했었다. 잘 알기 전까진 타인의 말에 한점 흔들림 없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파산신청자를 ‘남의 돈 빌려서 지우개로 쉽게 지우듯 하는 사람들’로 낙인찍은 것이다. 개인회생에 대한 과정을 속속히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듣고 판단했으며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정답처럼 자리해 있었다.
물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의도를 가지고 나쁘게 활용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또 다른 모양을 한 나쁜 놈의 불순한 의도에 걸려 사기를 당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혹은 가족 누군가의 채무를 책임지려다가 도리어 저가 힘들어지는 상황으로 치닫아 파산 절차를 밟아야 한다거나 가족들이랑 잘 살아보려다가 벼랑 끝에 몰리기 직전 회생을 하는 형편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의 경우들에 무게를 싣고 기사님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를 험상궂은 인물로 보았지만 서로 솔직해지고 나니 타인의 시선에 맞서며 삶을 고독하고 치열하게 버티는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시선이 전환되었다. 기사님을 내 마음대로 고독한 인물로 조명을 켰다. 개인 회생이라는 한 면만 보고 전체를 다 안다는 듯한 뉘앙스가 깔리진 않았는지 쓰면서 염려되지만 나는 기사님을 통해 현대인의 자화상인 허구 인물을 만들고 싶었을지 모른다. 왜? 세상이 점점 더 외로운 길로 가도록 장려하는 것 같기 때문에. 마음이 쓰렸던 기사가 연결되어 떠오른다. 고독사.
고독사라는 말조차 떠난 사람의 자리를 더 비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불편한데 요즘에는 청년 고독사 비중도 노인 고독사 못지않게 커졌다는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된다.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갈수록 전 연령층의 고독사 비중이 높아진다는 건 사회 구조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신호이다. 한번 주어진 삶을 자신의 선택으로 끝내기까지 격통을 얼마나 앓았으면 그랬을지 마음이 무거웠다. 자살을 죄악시 여기는 기독교인이나 ‘삶은 있는 그대로가 행복.’이라고 보는 긍정론자에겐 크게 혼날 일이지만 지지대가 없다면 어느 한순간에 쉽고 어이없게 끈을 놓을 수 있다.
한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에는 막중한 책임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순기능은 있다. 생에 초밀착 나랑 함께 할 사람들, 누가 뭐래도 날 지켜주는 내편들이 생긴다는 점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일은 한 사람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의 벽 앞에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은 이제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혼자 살다 어떤 사고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그간의 외로움이 밀려들어 뜬금없이 삶을 마감하는 건 아닐까. 갑작스레 암환자로 삶의 둘레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소외가 된 기분을 느꼈을 때 상처받았으며 피해의식은 늘고 나를 더 가둬 외로움의 극치를 알 수 있었다. 나를 지켜주는 가정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일들로 인생길이 무너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회복 탄력성이 적은 사람이 얼마든지 다시 또 마음을 활짝 펴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시선과 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내세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 외침은 아마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