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걸려온 아빠의 선언

아빠의 책을 만드는 무모한 도전

by 케이

어느 날, 갑자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딸! 출판사는 잘 다니냐?"


회사 복직하고 한 달 만에 안부전화가 오다니?

과연 무뚝뚝한 우리 아빠답다!


"잘 다니지~ 아빠는? 건강은 괜찮아?"

"난 걸을 때마다 다리가 아파죽겄다..! 근데 병원에서는 좋아졌대"


몇 년 전 척수염을 앓으면서 아빠는 왼쪽 발바닥의 신경이 죽었고,

다리도 좀 절게 되셨다. 걷는 게 불편하니 일상생활 자체가 곤란한 터..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던 아빠인데 힘들단 소리를 들으니

딸로서 마음은 아픈데 그저 운동 챙기란 잔소리만 나오는 걸 보니

나도 무뚝뚝한 아빠 딸이 맞나 보다.

어쨌든 이제 안부를 나눴으니 할 말 다했다 싶어 평소 패턴대로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아빠가 놀라운 말을 꺼내셨다.


"나도 다리만 괜찮아지면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전에 네가 말한 그거 있지? 책 쓰란 거. 그것도 할 거니깐 그렇게 알아라."

"오, 진짜? 그래 아빠 함 해봐!"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기에 오히려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출판 선언을 하다니! 그렇게 어버버하는 사이 짧은 응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금방 끝났다.



가족의 책을 만든다고?

우리 아빠는 그냥 은퇴한 일반인이다.

즉 평생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출간 제안을 받은 적도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선언을 하게 되셨는지, 얘기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년 넘게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족, 심지어 지인의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은 상업 출판사 기준으로는 저자 자격에 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부모님의 책을 만들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준 것은 같은 출판사 동료였던 수님이었다.(별칭이다)

수님은 제목도 잘 뽑고 카피도 잘 쓰고 아주 똑 부러지는 편집자였다. (지금은 탈출판 성공.. 이렇게 출판계는 또 하나의 인재를 잃었다..)

평소처럼 수님과 점심시간에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저 할머니 책 내주려고 했잖아요."

"네? 할머니가 원래 작가세요?"

"아 그건 아니구요, 제가 만들고 싶어서요."


수님의 할머니도 일반 출판사에게 출간 제안을 받은 적이 평생 없는 일반인(?)이셨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수님은 할머니의 책을 만들려고 했다.

오로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왜 일반인의 책을 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출판사에서는 한 권의 책을 내는데 1000만 원 이상 쓰고,

아무리 비용을 후려쳐 저렴하게 만든다고 해도 몇 백만 원은 드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상업 출판사의 문법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개인의 책을 낸다는 게 굉장히 이상했다.


부모님의 책을 못 낼 건 뭐람?

AI가 발달하면서 지금은 개인이 책을 내는 것이 옛날보다 훨씬 쉬워졌다.

하지만 몇 년 전인 당시만 해도 AI가 없던 시절에 한 개인이 책을 낸다는 것은 정말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글을 평소 안 써본 개인이 한 권 분량의 글을 쓰는 것도 힘들고,

어찌어찌 편집자인 가족의 도움으로 쓴다고 해도 디자인도 해야 하고 제작도 해야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수님은 정말 시대를 앞서나갔던 셈이다.


편집자로 책을 만들면서 나는 책을 만드는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격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책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검증된 사람만이 책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부모님은 작가 자격에 미달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책을 내가 만들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는 너무 멋졌다.

무엇보다 내가 읽고 싶고 작업하고 싶은 책이고,

우리 가족들은 누구보다 부모님의 책을 열렬히 읽고 간직할 독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 덕에 대학도 나오고 밥도 벌어먹으며 사고 있는데

부모님의 이름으로 책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편집자인 내가 할 수 있는 효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몇 년 전, 명절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나도 이렇게 선언해버린 것이다.


"엄마, 아빠! 한 번 책 한 권 써보자. 편집자 딸 둔 덕 좀 봐야지~

직업적인 지식도 괜찮고 삶에 대한 에세이도 괜찮고..

내가 만들어드릴게! 우리 출판사에 투고 원고 맨날 몇 개씩 날라오는데.. 이런 기회 없다!"


사실 투고 원고는 출판사를 보고 오는 것이지, 나를 보고 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경력 있는 편집자고 책을 잘 만든다는 자신감이 나를 그렇게 무모한 말을 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난 부모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다. 책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가?


"아이고 무슨 책이냐. 번거롭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니, 싸늘이라기보다 그냥 관심도 없으셨다..

그 후에도 나는 명절에 모일 때마다 종종 글을 써보라고는 말했는데 그냥 해봐~ 정도의 수준이었고 그 말도 몇 차례 한 후에는 안 하게 되었다.


부모를 모시고 효도 여행 가는 자식의 불행과 행복

전화를 끊고 나니 내가 그렇게 그동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글 쓰라고 해도

무슨 글을 쓰냐면 손사래를 치던 아빠가 많이 유해졌구나 싶어 좀 생각이 많아졌다.

과연 이 아빠의 책 프로젝트가 결실을 볼지, 아니면 이 프롤로그에서 멈출지 모르겠다.

마치 부모님 모시고 효도 여행 떠났다가 다시는 같이 여행 안 가겠다고 선언하는 자식처럼,

나도 나중에 내가 왜 부모님에게 출간 제안을 했을까를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선 이 아빠의 선언을 남겨둔다.

어쩌면 내가 수님에게 영감을 얻은 것처럼, 어떤 동료는 내 글을 보고 가족의 책을 만드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족의 책을 작업해 준다는 건, 어쩌면 출판인으로서 특별한 효도 여행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특. 남들이 볼 때 멋져 보이지만 본인은 죽어나감)

기대 반, 후회 반으로 이 프로젝트의 프롤로그를 남겨본다.

출판인 동료도 이 프로젝트에 도전해 보길 바라며,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내가 초심을 잃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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