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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l 18. 2022

저는 당신에게 괜찮은 인간인가요

반려동물. 애정. 새로운 시작

#표지 그림: 가브리엘 뮌터. <새들의 아침 식사>. 1934.


  


  며칠 전이었다. 딸애의 학교 숙제를 함께 하고 있었다. 사회 숙제인데 ‘어떤 주제를 정해서 가족들이 회의를 하고 그 결과를 교과서에 적어 내는 것’이었다. 우선 주제를 정해야 하는데 격론 끝에 ‘우리 가족이 더 건강해지는 방법’이라는 주제가 결정되었다.


  회의가 예정보다 다소 늦게 시작했고, 곧 잠잘 시간이라 진행은 일사천리로 끝나 마지막으로 공증(?) 절차만 남았다. 참석자(가족)를 써야 했기에 각자 이름과 서명을 했는데, 갑자기 딸애가 ‘쓰유미도 써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뜬금없는 얘기에 왜냐고 물으니 '쓰유미'도 우리 가족이니까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쓰유미가 가족이라고? 나는 우기는 아이에게 바로 반격에 나섰다.


  “쓰유미가 우리 가족인데 평소에 그렇게 밥도 안 챙기고 먹을 물도 아빠가 주라고 해야 주는 거니? 쓰유미가 잘 지내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넌 가족한테 그렇게 하니?”


  “나 쓰유미 잘 챙기고 있거든요. 밥은 쓰유미가 한꺼번에 입에 물고 자기 집에 넣어두는 거고, 물은 내가 챙기고 있어. 지난번에는 쓰유미가 물통을 건드려서 쏟아진 거임!”    

 

쓰유미가 먹이를 입에 넣고 있는 모습


  쓰유미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인 햄스터이다. 쓰유미란 이름도 딸애가 지어 주었다. 처음 우리 집에 올 때는 갓 낳은 새끼 정도였는데 이젠 제법 자랐다.


  쓰유미가 우리 집에 들어올 때는 참으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쓰유미가 아니라 '내'가 말이다.




  딸애는 매주 수요일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이와 길고양이를 돌봐준다. 먹이도 주고 냥이(이름은 ‘순이’란다)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같이 놀아주는 데 얼마나 헌신적인지. 그것의 반의반만 부모에게 해줘도 고마울 텐데.  한 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 전생은 고양이일 거야.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으로 모셨데. 일본에서도 고양이를 귀하게 여겼고. 아마 난 고양이 ‘신(바스테트)’이었을 거야.”      


  어디서 그런 내용을 들었는지 어쩔 땐 진짜 고양이 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끔씩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나를 시험하기도 한다. 자기가 오늘 저녁에 할 일이 미리 보인다고 하거나, 아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한다. 당연히 알겠지. ‘니 장난을 어떻게 맞춰줘야 빨리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걸 너도 보이지 않니?’


  그런 딸애이기에 진작부터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고 싶다고 내 기억으로 한 백 번은 넘게 울면서 떼를 썼지만 우리 부부는 완강히 거부했다. 우선 집에 털 날리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아내가 든든히 버티고 있는 데다가 나도 고양이는 괜히 사나울 것 같아서 논의의 상정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딸애는 불굴의 의지로 계속 두드렸다. 반려동물에 관한 한 엄마보다는 아빠가 만만해 보였는지 엄마가 없는 틈이 날 때마다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빠, 엄마 너무 한 것 같지 않아? ○○이도 고양이 키워.”


  “너 남과 비교하지 말라며? 이거 비교하는 거잖아. 그리고 나도 고양이는 좀 그래. 다른 동물로 해 봐”


  “엄마는 털 날리는 건 무조건 싫다고 하는데 다른 게 뭐가 있어?”


  “햄스터!”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내가 그 말을 하자 딸애는 ‘아빠가 햄스터는 괜찮다고 했다’고 엄마에게 협상을 시작했다. 딸애의 의기양양함에 아내는 말없는 눈빛으로 나의 배신을 저주했고,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변명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양쪽 모두에게 불신의 대답만 들어야 했다.   




  사실 난 십오륙 년 전쯤에 햄스터를 키웠었다. 그 녀석의 이름은 ‘럭키!’ 암수를 같이 키우면 갑자기 불어난다고 지인이 강조해서 수컷 한 마리만 키웠다. 다행히도 럭키는 혼자일 때도 별로 외로움을 타지 않았다. 대신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럭키를 보금자리에서 꺼내 주었다.


  거실 바닥에 놓아주면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더니 금방 어디론가 막 달아난다. 그러면 잽싸게 내 두 손이 장애물로 변신하는데 그때부터 럭키는 헤매기 시작한다. 살아 움직이는 미로에 갇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녀석을 보면서 얼마나 귀엽던지 한참 웃었다(물론 당하는 럭키는 화병 터지겠지만).


  한 번은 너무 자만하다가 그만 럭키가 옷장 밑으로 들어갈 때까지 막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름을 불러보고 먹이로 꾀어보았지만 럭키는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옷걸이를 길게 늘여 옷장 밑으로 넣고 쓸어보았지만 허사였다. 마지막으로는 옷장을 쿵쿵 두드리기도 하고 옆으로 밀어 보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그 조그마한 럭키가 다치기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화도 고 내가 너무 멍청하게 생각되어서 벌러덩 방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천장 벽지가 그날따라 너무 촌스러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가 내 머리를 스치는 것 같아 가만히 돌아보니 럭키가 언제 나왔는지 날 빤히 보고 있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가만히 자리에 엎드려 있는 럭키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믿고 애정을 주었다.


  그런 럭키의 신뢰를 내가 무참히 부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몇년간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날,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정신없이 짐들을 정리하고 사다리차로 내리고 차에 실었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새로 이사 갈 집으로 가는 중에 나는 깨달았다. 럭키가 내 옆에 없었다.


마지막에 마구잡이로 담는 이삿짐 상자들


  나중에 짐을 다 정리할 때쯤 럭키집이 나왔다. 빈 통인 줄 알고 다른 것들과 함께 한쪽에 마구잡이로 이삿짐 상자에 담겨 왔었던 것이다. 내가 확인했을 때에는 럭키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나 싶어 옆구리를 살짝 간지럽히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내 손길에도 럭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초롱초롱했던 럭키의 눈망울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협상이 많이 진척되었다. 아내가 제일 싫어하는, 털이 날리는 동물도 아닌 데다가 쥐에 속하지만 얼마나 귀여운가. 냥이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자기 집에서 조용히 지낼 거라는 사실은 아내를 어느 정도 안심시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예전 구피(관상어) 사례에서 보듯 딸애의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에야 귀여워하겠지만 곧 관심도 시들해질 것이고 홀로 방치될 햄스터를 또 누가 어떻게 키울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팠다.


  이 눈치 빠른 아이는 자기 앞에 인상을 쓰고 있는 두 어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곤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아이가 내놓는 대책들은 너무나 의심스러웠다. 우리 부부는 기업회생 절차의 채권단인양 좀 더 확실한 물증(담보)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아무래도 더 아쉬운 쪽은 회생기업이지 채권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협상에는 반드시 아쉬운 측이 손해보게 마련이다.


  최종적인 협상 결과는 대충 이랬던 것 같다. 만약 ‘이번 햄스터 키우기마저도 엄마, 아빠를 실망시키게 되면 앞으론 어떤 반려동물도 키울 수 없으며, 얼마 후 키즈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꿔주기로 한 약속을 파기한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온 쓰유미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귀여움의 대상이었으나 곧 또 다른 관심사(여전히 고양이)에 밀렸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아빠의 야단에 못이겨 억지로 먹이를 주던 딸애의 손을 쓰유미가 물어버리는 참변이 발생하고서는 무섭다는 핑계로 더더욱 자신의 의무를 안 하려고 했다.


  나에겐 천만다행스럽게도 쓰유미를 이쁘게 본 아내가 쓰유미를 도맡아 챙겼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내는 평소 청결(세균)에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어, 2주일 정도로 돌아오는 쓰유미집 ‘대청소 날’은 두 모녀의 고성과 괴성이 뒤섞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나는 그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방에 들어가 있다가 다 정리된 쓰레기봉투만 버려주면 되었다.




  어느 수요일 날, 여느 때처럼 딸애는 순이(길냥이)를 돌보러 먹이와 장난감(빨간색 포인터, 반짝이 낚싯대, 야광 볼 등)을 챙기며 나가다가 갑자기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그런데, 아빠는 왜 고양이가 무서워?”


  “글쎄 그냥 고양이가 할퀴거나 물까 봐.”


  “고양이한테 물려 봤어? 고양이는 자기한테 잘해주면 안 물어. 난 한 번도 물린 적이 없는데.”


  “그렇구나......”     


  아이는 친구의 호출에 재빨리 대문을 닫고 나갔고, 나만 덩그러니 거실에 남아 있었다. 그리곤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 언젠가로 빨려 들어갔다.     



 

  난 초등학생 때 집안 사정으로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삼 년 정도 살았다. 첩첩산중이 어디까지를 말하는지는 주관적 개념이겠지만 그 어느 언저리쯤에는 속할 그런 곳이었다.


  기억의 한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장마 때였는지 비가 많이 왔고 밤이 되었는데 온 동네(사실 몇 가구 되지도 않았다)가 정전이 되어서 촛불 몇 개로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술이 얼큰히 올라오신 할아버지가 주막에서 돌아오셨는데 신문에 뭔가를 감싸서 안고 오셨다.


  우리 방에 들어오시더니 뭔가 재미난 것을 보여 줄 것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으시며 신문을 풀었다. 우리(나와 누나)는 궁금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뭔가가 후다닥 움직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우린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는데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더니 손으로 그 뭔가를 잡아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내 기억 속 '검댕이'와 비슷한 냥이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는데 촛불로 비춰 보니 새끼 고양이었다. 온몸이 새까만데 배 부분만 살짝 흰색이었다. 고양이 눈에 비친 촛불이 반짝이는데 여간 총명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으로 가셨다, 우리는 갑자기 생긴 새끼 고양이가 귀엽기는 했지만 고양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는 처음 본 지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새끼 고양이는 우리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방바닥 가운데 있는 촛불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 촛불을 처음 본 모양이었다. 최면에 걸린 듯 조금씩 조금씩 촛불에 다가가면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만 너무 가까이까지 접근했는지 고양이의 자랑인 콧수염(내 기억엔 왼쪽이었다) 한 쪽이 촛불에 타 버렸다. 고양이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걸 보는 우리는 웃음이 터졌지만 혹여나 고양이가 우릴 원망할까 봐 한 손은 입을 가리고 다른 손은 바닥을 치면서 억지고 참아야 했다(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고양이는 몸이 계속 자라남에도 불구하고 불타버린 콧수염은 회복되지 않았다).


  우린 새끼 고양이 이름을 뭘로 지어줄까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검댕이’라고 지었다. 검댕이는 우리 집에서 잘 적응했다. 게다가 우리가 쉴 새 없이 놀아주었기(괴롭혔기)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나자 제법 자라 늠름한 사나이 냥이가 되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 끝나고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뭔가 시커먼 것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쫓고 쫓기는 필사의 질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산스러운 움직임은 곧 정리되었다.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검댕이가 한 손으로 쥐를 누르면서 주위를 찾다가 마침 나를 고는 반기듯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으며 윙크를 날렸다.


  언제부터 저런 괴물로 변했는지 깜짝 놀란 나는 검댕이에게 달려가면서 소리쳤고 검댕이는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삐쳤는지 쥐를 입에 물고 바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검댕이를 그날 밤 촛불을 보면서 신기해하던 새끼 고양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 뒤로는 검댕이를 우리 방에 들이지 않았다. 쥐도 징그러운데 그 쥐를 잡아먹은 손발로 우리 방에 들어오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와 검댕이는 서로 데면데면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한참 더운 여름날. 시골에서는 방 문틀에 발을 치고 문은 열어 두고 잤었다. 어느 밤인가 잠을 자는데 뭔지 모를 오싹함에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 노란 빛 두 개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뒤로 자빠졌고 그 노란 빛이 나를 스쳐 사라지는데 순간 내 손등에 찌릿하고 아픔이 느껴졌다.


  검댕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열린 방문으로 날 찾아왔는데 내가 소리치는 바람에 도망치다가 발톱으로 내 손등에 상처를 냈을 것이다. 당시의 난 어린 고양이보다도 생각이 짧았다.


  그날 이후 검댕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완전한 야생 고양이로의 삶을 선택했다. 나또한 초3학년 겨울방학 때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 우린 서로 생사여부도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난 딸애의 반려동물에 대한 무성의함을 탓했지만 그 나이 때 나는 더 무책임하고 신의가 없었다. 어쩌면 내 딸이 아직도 순수한 맘을 가지고 동물들과 영혼의 교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 카페를 즐겨 갔고 동물들에게는 늘 호의적이었다.


  친구랑 길냥이 보러 간 딸애가 밖이 깜깜해져도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아,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지 아니?”


  “그게 아니고 순이가 아픈지 먹이도 잘 안 먹고 별로 놀지도 않아. 근데 우리가 가려고 하면 자꾸 가지 말라고 해서 아직까지 옆에 있어주고 있는 거야.”   

  

목이 마른지 연신 들이키는 어느 냥이와 뒤를 봐주는 다른 냥이

  딸애의 말을 들으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수정같이 맑은 마음을 가진 이에게만 허락된 선물 같은 건가? 


  지금도 산타클로스를 믿어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고, 만약 신이 자기에게 한 가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이런 아이의 맘을 세속적인 내가 폄하해 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의 맘을 지켜주고 싶어졌다. 나야 뭐, 벌써 늙다리가 되었지만 요정이나 정령, 천사를 기다리는 내 딸은 가능한 한 그 맘을 오래도록 지니고 살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이가 많이 아프니 좀 더 놀아줘.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    

 

  나는 못했지만 자연을 아끼고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 더 마음을 열어야겠다. 그분들에게 자그마하나마 심적이나 물적으로 지원하는 실천도 해 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덩달아 동물들에게 조금은 괜찮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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