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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l 03. 2024

지금이 아닌 언젠가

딸애가 사는 세상

#표지 그림: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1971.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 살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
그 신체와 피부를 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하며,
그가 하는 일마다 잘못되고 뒤틀리게 하는데,
이는 그 사람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강인하게 함으로써,
그의 부족한 능력을 키워주려는 것이다.


    - 맹자 제6편 고자장구 하 15장 -



맹자(BC 372~289)



  중국 전국시대 추나라의 성현이었던 '맹자(孟子)'의 가르침 중에는 좋은 글귀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나에게 있어 평생 동안 가슴에 두고 새기고픈 명문장이 하나 있다. 바로 ‘맹자 제6편 고자장구 하 15장’이다.


  내가 이 문장을 처음 접한 것은 학창 시절 어느 TV 사극 드라마에서였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맹자의 말씀을 굳은 신조로 삼아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다. 그런 그의 행적을 현실에 투사하면서 나도 그렇게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내 삶은 드라마가 아니고 더욱이 난 주인공도 아니기에, 그만한 의지나 용기를 쏟아내지 못했고 지금의 이런 나로 살고 있다. 당연한 귀결임에도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 빈약함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살과 뼈가 고달프고, 신체와 피부가 주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냥 큰 어려움 없이도 술술 잘 풀리는 경우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맹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였다.


사람은 항상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비로소 고치게 된다. 마음이 괴롭고, 자꾸 생각에 걸려야 분발한다. 실패 치부가 드러나야만 깨닫는 것이다. 밖으로 외환이 없으면, 이런 나라는 항상 망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우환 가운데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일이다. 불금(金)과 불토(土)를 기분 좋게 지내고 일요일을 맞이했는데 저녁이 되자 갑자기 딸애가 목이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평소 내가 ‘역류성식도염’을 달고 살기에 딸애도 그런가 싶어 걱정스레 물었다.


  “ㅇㅇ아, 목구멍이 갑갑해? 침 삼키기 힘들어?”

  “잘 모르겠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몸도 좀 피곤해”

  “너 감기 걸렸나 보다. 감기약 먹어야겠다.”

  “아니, 약은 아직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이따 더 아프면 먹을게.”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내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시간은 좀 더 흘러 밤이 깊어지면서 '월요병'이 스멀스멀 밀려 올쯤이 되었을 때 거실에서 아내와 딸애의 높아진 언성이 들려왔다.


  “엄마, 목이 너무 아파. 다리도 아프고.”

  “그러니까 이 약 먹으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 내일 1교시만 하고 조퇴하면 안 돼?”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 수업 끝나고 병원 가도 되잖아.”

  “그다음 학원도 가고? 그러면 난 쉬지도 못하잖아. 몸도 아픈데!”

  “그럼 2교시까지는 하고 조퇴해!”

  “몸이 아픈데 2교시까지 어떡해!”


동화책 '이젠 너랑 절교야' 중에서


  날카로운 아내의 말을 직격으로 튕겨내듯 딸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마 문도 잠갔겠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르면서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차피 조퇴할 건데 1교시나 2교시가 무슨 의미가 있기에 마치 절교하는 연인처럼 저리도 휙 돌아설까?


  둘 중 누구한테라도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경험상 이미 지겹도록 겪않았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냥 모른척하기로 했다.


  잠잘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내가 먼저 침실에 들어왔다. 나는 별 관심 없는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재빨리 바꿔 슬쩍 물어봤다. 딸애가 왜 저러는지. 아내는 안 그래도 말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는 생각인지 전후사정을 털어놓는데, 그걸 듣는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딸애는 욕심이 많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적절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무엇을 하든 아주 잘하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더 나을 성싶다. ‘그게 무슨 문제야? 다들 그렇잖아!다만, 문제는 그 반응에 있다.


  아직 어린 탓일까? 안타깝게도 딸애는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일에 다 최고가 될 수 없음은 경험상 어느 정도 터득하였을 텐데도 정작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  때면 극도의 불안을 보인다.


  특히나 신체적인 부분에서는 더하다. 같이 다니던 어린이집 친구들을 어느 순간 올려다보게 되면서, 줄넘기도 태권도도 친구들보다 잘하지 못하게 되면서 딸애는 그런 현실을 피하고 싶어 했다.


줄넘기는 어려워!!!

  잘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동기부여를 하였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친구들에 비해 자꾸 뒤처지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쉽게 포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찌 보면 헛된 망상을 좇지 않고 자신이 잘하는 부분에 선택과 집중으로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칭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12살 초5학년생의 사고방식이라면 왠지 재고(再考)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알고 보니 월요일 2교시에 체육 수행평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종목은 '오래 달리기'였다. 딸애는 오래 달리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안 그래도 급우들한테 뒤로 처지는 모양새인데 몸까지 아파오니 그냥 피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아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장모님까지 동원하는 딸애의 잔꾀에, 결국은 1교시만 하고 조퇴하는 촌극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날 퇴근하고 마주친 딸애의 표정은 너무나도 해맑고 즐거워 보였다.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경우야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주변인들이 도와주었기에 뜻한 대로 되었지만 계속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은 딸애가 생각하는 만큼 누구에게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람은 각기 타고나는 재능이나 성격도 다르고 관심분야도 천차만별이기에 공통된 분야에서 남보다 뛰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전공인 한 분야에서라도 성공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자신에게 맞는 그 분야를 찾아내서 전념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까?  


  내 딸애는 흉터도 남지 않는 작은 상처 정도로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처럼 세상 혼자 잘난줄 알다가 남들에 밀려 넘어지고 치이다가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자리 보전하는 속물이 되지 않길 바란다.  


마음의 흉터

  미리 체념하고 한숨 쉬는 사람도 별로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마치 더러운 것이라 피하는 듯한 위선은 더욱 꼴불견이다. 조선시대 남산 '딸깍발이'로 불렸던 선비들처럼 그야말로 물 마시고 이 쑤시는 고집쟁이는 되지 않도록 잘 돌봐야겠다.





작가 김용태의 '야해야 청춘'에는 이런 글이 있다.


물이 부족해야
땅속에 있는 물을 찾기 위해서
뿌리가 안간힘을 다해 뻗어갑니다.
그래야 꽃도 피지요.
화초가 꽃을 피우는 이유가 종자를 번식하기 위함인데
물이 부족해서 위기를 느껴야
종자를 번식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물이 부족해야 땅속에 있는 물을 찾으러 뿌리가 안간힘을 다해 뻗는다.


  누구나 사람들은 궁핍과 역경을 불리하게 생각하고 풍족과 순풍을 추구한다. 부족이 창조를 낳는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사의 이치인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드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커가는 게 자녀라는데 내 어두운 그림자가 혹여 딸애에게 나쁜 선례를 보여주진 않았는지 걱정된다. 딸애의 잘못을 논하기 앞서 나는 좋은 아버지인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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