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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Dec 01. 2022

멍똥

'끝말잇기'로 다시 즐거워진 우리 집

#표지 그림: 우리집 화가. <예쁜 내 모습>. 2022.



  글을 쓰기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이번 글에는 비속어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단어가 자주 출몰할 것이며, 때로는 이를 매우 미화하는 대목이 나올 수도 있다.

  평소 올곧고 기풍 있는 글만을 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내(필자)’가 이런 내용을 쓰게 된 배경에는 딸애의 강압적인 협박과 교살스러운 회유가 있었음을 이 글을 통해 감히 밝힌다. 평소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리라. 그녀의 포악한 성정(性情)과 집요한 억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몇 주 전 일을 다시 떠올리려니 오래 입어 해진 옷처럼 군데군데 기억의 구멍이 나 있고 씨줄 날줄이 끊어져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필코 써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번만큼 깊은 적이 있었나 싶다.


  그날 저녁도 역시나 나와 딸애는 어떤 일로 한 판의 푸닥거리를 벌였고, 이로 인해 생기(生氣)는 소진되고 감정의 골은 깊어져 있었다. 늘 그렇듯이 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루는 딸애의 '대인배' 같은 기질을 속 좁은 내가 시기하여 언성이 높아졌으리라.


  토라진 나는 안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마음을 삭이고 있었다. 이럴 땐 큰 이야기보다는 짤막한 단편으로 머리를 달래주는 게 상책임을 경험상 체득한 나였다.


  언제쯤 나는 딸애의 그 높고도 고상한 의기(義氣)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만의 책 세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금속이 비틀어지는 듯한 낮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내 신경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바라본 안방 문손잡이는 내 날카로운 눈초리에 무안함을 못 이겨서인지 살짝 돌아앉았다. 난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책에 집중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몰래 주위를 살피는 새끼 길냥이처럼, 살짝 열린 문 아래로 통통한 볼 살 위에 얹혀 가늘게 보이는 두 눈이 내 쪽을 힐끔 쳐다본다. 목표물의 허점을 파악한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조심스럽게 작은 몸을 문 틈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계산 착오로 생각보다 더 많은 물리량의 힘이 가해진 탓인지 안방 문이 급하게 밀려 성마른 헛기침을 내뱉는다.


  몰래 들어오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을 직감한 것일까? 그 괴생명체는 이내 우리 집 딸애로 몸을 바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앉는다. 나는 이것의 정체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게 이렇게까지 가깝게 접근하도록 무방비로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지만 겉으론 여전히 책만 바라보고 있다.


  한참의 겸연쩍한 시간이 흘러, 딸애로 변한 자(者)가 먼저 내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건다.


  “아빠, 뭐 해? 안 바쁘면 나랑 놀자.”


  “지금 책 보고 있는데. 좀 전까지 계속 일 했는데 나도 좀 쉬어야지.”


  “오늘 나랑 안 놀았잖아. 부모가 자녀와 놀아주는 것도 해야 할 일이야.”


  “그럼 엄마한테 놀아달라고 해. 너 오늘 엄마하고 안 놀았잖아.”


  “엄마는 지금 별로 기분이 안 좋아. 그리고 엄마는 아빠처럼 재미있게 놀아주지 않아.”


  안 그래도 아내는 나와의 말다툼으로 하루 종일 저기압 상태였다. 이럴 땐 눈에 안 띄는 게 낫다는 걸 아는 자는 이 집에서 나와 딸애뿐이다. 그렇다면 딸애를 가장한 이 생명체는 딸애가 맞는 모양이다. 오해가 풀리자 미안한 생각도 들어서 책을 내려놓았다.




  “늦었으니 너무 오래는 안 돼. 그래, 뭐하고 놀 건데?”


  “거실에서 실바니안 가지고 식당 놀이할까?”


  “아니, 아빠는 좀 피곤해.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여기서 할 수 있는 걸로 정해.”


  어차피 딸애는 나와의 막힌 물꼬를 트는 게 목적이었는가 보다. 평소와는 달리 내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


  “그럼 ‘끝말잇기’ 할까?”


  “좋아. 내가 먼저 할 게.”


  “안돼. 내가 먼저 할 거야.”


  “처음부터 말 막히는 단어는 금지야.”


끝말잇기


  딸애는 의외로 끝말잇기를 잘한다. 초등생이라고 우습게 봤다간 꼼짝없이 지고 만다. 이번엔 일부러 져 준 것일까? 첫 판을 싱겁게 내가 이겼다. 별 억지도 부리지 않고 패배를 인정했다. 딸애는 묘하게 웃더니 다시 첫 단어를 입에서 뗀다.


  “똥.”


  “장난쳐? 딴 거로 해.”


  “왜 똥이 안 되는데?”


  하긴 그 단어가 안 될 아무런 제한조건을 미리 정하지 않았었다. ‘그런 식으로 한다 이거지.’ 나도 피식 웃으며 이어갔다.


  “똥집.”


  “집똥.”


  “똥개.”


  “개똥.”


  ‘이건 뭐 똥판으로 가자는 거잖아.’ 나도 오기가 생겼다. 거세게 나가기로 했다.


  “똥○멍.”


  “......




  딸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멍게’도 있고 ‘멍청이’도 생각나는데 그 순간에는 나도, 딸애도 도저히 끝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던진 단어의 충격이 우리 두 사람의 사고를 닫아버렸다. 난 처음에는 좀 민망하다가 곧 승리감에 도취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또 이겼지?”


  “아니, 지금 말할 거야.”


  “그럼 빨리 해.”


  “자꾸 재촉하지 마. 멍... 똥...”


  “뭐라고?”


  “멍똥! 멍똥!”


  어차피 게임은 졌으니 똥판으로 몰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없는 단어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멍똥'이라는 단어가 어디 있어? 이건 내가 이긴 거야.”


  “왜 멍똥이 없어?”


  “멍똥이 무슨 뜻인데?”


  할 말이 없어진 딸애가 멍하니 날 보다가 갑자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뭔가를 급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리곤 소리쳤다.


  “봐봐, 멍똥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그게 뭔데?”


  “프랑스 휴양지!”


  “뭐라고, 이리 줘봐.”


  딸애도 진짜 반신반의로 찾아봤을 텐데 막상 단어가 나오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뺏어 들여다보았다. 정말 프랑스 남부 ‘니스’에 있는 아름다운 해안도시, “멍똥(Menton)”이 있었다.

프랑스 남부 ‘니스’에 있는 아름다운 해안도시, 멍똥(Menton).




  끝말잇기 '멍똥'편은 무승부로 결정했다. 딸애도 나도 서로의 타당한 부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런던(London), 파리(Paris) 같은 외국 도시를 인정한다면 '멍똥(Menton)'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하기 시작하면 아무 발음으로도 단어를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외국어 중 어떤 발음의 단어가 있을지는 도저히 가늠이 안 갈 정도니까 말이다.


  이번처럼 곤혹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나름의 게임의 규칙(rules of the game)을 정했다. 단어를 제시하였으나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할 때는 사전이나 스마트폰을 찾아보기 앞서 그 뜻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똥으로 시작해 똥으로 끝난’ 끝말잇기의 웃음 태풍은 그날 저녁 딸애와 나에게 있었던 감정의 찌꺼기를 날려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까르르 웃는 열 살 소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아빠, 이거 엄마한테 가서도 해볼까?”


  “글쎄, 좋아할까?”


  “그냥 한번 해보지 뭐. 아까 아빠한테도 통했잖아.”


  그러곤 쪼르륵 거실 너머로 달려 나갔다. 곧 저쪽에서 뭐라고 소곤소곤하는 인정 넘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딸애의 의도가 어느 정도 통하는 가 보다.


  자기도 속상했을 텐데 먼저 다가와 손을 내민 딸애의 의젓함이 대견했다. 마음이 아픈 부모의 속사정까지 공감하고 배려해주는 딸애의 고운 심성이 고마웠다.


  정말 언제쯤 나는 딸애의 그 높고도 고상한 의기(義氣)를 헤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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