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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Aug 22. 2024

잊을 수 있을까

과거와 마주하기

#표지 그림: 구스투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1875.



이젠 잊기로 해요.
이젠 잊어야 해요.

사람 없는 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걸 잊어요.

그대 생일 그대에게 선물했던
모든 의미를 잊어요.

술 취한 밤 그대에게 고백했던
모든 일들을 잊어요.

눈 오던 날 같이 걷던 영화처럼
그 좋았던 걸 잊어요.


  - ‘이장희’ 작사, 작곡. <이젠 잊기로 해요> 중에서 -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노래 <이젠 잊기로 해요> 원곡 가수를 ‘김완선’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더러 있다. 사실은 1974년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 ‘쎄시봉’의 멤버였던 싱어송 라이터 겸 가수 ‘이장희’가 발표한 노래이다.


음악다방 쎄시봉 멤버들. 왼쪽부터 김세환, 윤형주, 이장희, 송창식


  김완선 3집 앨범에서 이장희가 프로듀싱을 맡은 인연으로, 1989년 그녀의 4집 앨범에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간절한 추억을 하나씩 곱씹으면서도 잊어야 한다고 말하는 가사에는 처절한 슬픔이 응축돼 있다.


  쎄시봉의 포크송 분위기였던 원곡과는 달리 그녀 특유의 섹시한 보이스와 몽환적인 분위기로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는 그녀가 나오는 무대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김완선의 ‘인생곡’이 되었다.


50대 중반이라고 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인 나의 마돈나, 가수 김완선. <이젠 잊기로 해요>를 부르는 그녀의 눈가에 슬픔이 담겨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속절없이 가슴 한 편이 미어져오는 아련함을 지울 수 없다.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그 ‘술 취한 밤 고백했던 모든 일들’의 기억 끝자락을 붙잡고 싶어서다. 과연 ‘눈 오던 날 같이 걷던 영화처럼 그 좋았던 걸’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 살아간다. 대부분 과거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후회하느라 현재를 우울하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 가끔은 그 반대의 상황으로 곤란을 겪기도 하는데, 과거의 영광과 행복을 끊임없이 소환하여 초라한 자신의 현재와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모두 과거로 인해 현재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데 과거는 [기억]의 산물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 요상한 놈이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적 기록’이라기보다는 ‘감정적 정황’에 가깝다. 우리 뇌는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을 취사선택해 기억을 만들어 낸다. 꺼내어 열어보기 쉽게 편집, 또는 왜곡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윤색되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은 기억으로 굴절되는 것이다. 마치 예전에 유행했던 원곡을 다른 가수가 새로운 해석을 더해 자신의 색을 입히고 다른 스타일로 만드는 ‘커버곡’과 비슷하다.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윤색되기도 한다.




  과오로 낙인찍힌 기억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연신 후회로 갈팡질팡하고,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믿었던 상황이 다시 떠올라 절망에 빠진다.


  후회라는 감정은 정말 집요해서 떨치기가 쉽지 않다. 후회의 굴레에 깊게 빠지게 되면 헤쳐 나오기 힘들다. 반복적인 후회가 심각할 정도로 누적되면 정신적으로 문제를 유발해 일상의 삶이 신기루처럼 허망해진다.


  반대로, 지금 발붙이고 있는 현실이 싫을수록 기억은 더 열심히 과거의 장면들을 낭만스럽게 포장한다. 이 포장은 개인이 간직한 삶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한 시절이나 시대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적인 감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미래에 대한 기대는 품을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 지점을 그리워할 뿐이다.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의 한 장면. 영화 제목처럼 배우 '장만옥'과 '양조위'의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던 시절 모습이다.


  이렇게 어떤 과거이든 그것의 어느 순간에 계속 얽매여 있어야 한다면 건강한 현재의 삶을 살기는 요연해 보인다.




 입추(立秋)를 지나 말복(末伏)을 건너 광복절(光復節)도 보냈건만 올해 더위는 좀처럼 가실 줄 모른다. 가히 염천지옥(炎天地獄)이라 할 만한데, 아닌 게 아니라 올여름은 최고 기온, 열대야 일수, 여름철 전력 수요량 등 역대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그래도 휴가를 떠났던 직원들은 여지없이 모두 돌아왔다. 직원들의 타는 속은 알바 없다는 듯 회사는 오랜만에 꽉 찬 사무실을 보면서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는 올 하반기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내년 사업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직원들의 이중고가 이어질 것이다.  


  다들 밝은 척을 하면서 버티고 있지만 고단하고 불안한 마음은 계속 이어진다. 문득 그들에게 이번 여름휴가와 회사생활은 어떤 과거로 남을지 궁금해졌다. 기억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와 누군가에겐 악몽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것이다.


도서 <오늘부로 일년 간 휴직합니다> 중에서 일러스트 캡처


  세상은 우릴 가두고 관성을 따라가라 강요한다. 나도 여태껏 그 행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니, 열심히 좇아가려고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기억을 소중한 추억으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싶다.


참 다행이다. 지금 힘들 때 견딜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서.

또한 다행이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지금 나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눈물 나도록 다행이다. 미래의 나에게 선물할, 아름다운 과거가 될, 오늘이 있어서.




  오늘 아침을 먹고 있는데 장모님이 거실에 있는 화분들에게 물을 주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어머, 어제까지 피었던 꽃이 오늘 떨어져 있네. 올해 들어 세 번째 피었던 꽃인데....... 어디 또 꽃이 피는지 기다려봐야겠다."


  떨어진 꽃을 발견하고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다음에 필 꽃을 희망하는 장모님을 보면서 나를 반성했다. 아마 나였다면 떨어진 꽃을 보며 잘 간수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쁘게 피어있던 꽃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나의 무관심에 의기소침했을 것이다.  



  출근하면서 김완선의 <이젠 잊기로 해요>를 연속 듣기로 설정하고 가는 내내 들었다. 같은 노래인데 오늘은 이별의 슬픔보다는 보석처럼 값진 추억에 대한 향수가 느껴졌다. 현재를 꼭 붙들고 있을 때야 비로소 과거를 깨끗한 마음으로 추억할 수도,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


  난데없이 들이닥쳐 나를 울적하게, 가끔은 분개하게까지 만드는 어두운 기억들과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해야겠다. 그간 미처 말하지 못했던 내 심정을 전하고 싶다.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감사하고 싶다.


  현재의 나로 이끌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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