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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l 16. 2023

너의 마음은

잊혀 있던 추억 하나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가를 위해서 남겨두겠소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중에서 잔나비 작사, 작곡, 편곡.


잔나비 정규 1집 앨범 자켓


  이 곡은 2016년 8월 4일에 발매된 잔나비 정규 1집 'MONKEY HOTEL'의 2번 트랙이자 타이틀 곡이다. 잔나비의 리더 '최정훈'이 자신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밝혔다. 


잔나비 리더 최정훈


  다만 노래 만든 지가 오래되어서 이제는 전 여친을 생각해도 감정이입이 안 된다고도 말하였다(*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패널들은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저작권' 뿐이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지루한 장맛비가 며칠째 계속 내리고 있다. 더위는 좀 누그러졌지만 물기를 잔뜩 먹은 공기는 흐느적거리는 내 몸에 붙어 온통 땀을 뱉어 내고 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쾌지수를 불러오는 일이라 주말에도 집 안에서 에어컨을 켠 채 두문불출하고 있다.

  

  책도 몇 권 꺼내 보고 라디오도 들어 보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무엇 하나 집중할 수가 없다. 생각만 많지 어느 것도 실천하기 귀찮으니 그 결과는 괴로움뿐이다. 생각을 걷어내야 다. 가끔은 머릿속을 비워야 한다.


  생각 없는 좀비가 되기는 의외로 쉽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내어 '유튜브'를 보았다. 이미 유튜브는 지금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내가 선택할 만한 영상들 목록을 보여주는데(똑똑한 AI 덕분이다), 그중에는 잔나비의 노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뮤직비디오(Music Vedio)도 있었다.


  수많은 콘텐츠 중에서 하필 왜 그것을 눌렀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라고 해야 할까나.


  그러나 무의식 중에 누른 순간 5분짜리 MV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난 한참 동안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뮤직비디오의 시작 장면.


  술버릇이 좋지 못한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 살고 있는 여자는 매일매일이 지겹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폭력을 휘두르기 십상이고 그런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오래전에 이미 자취를 감추셨다.


  여느 날과 같이 술을 드신 아버지를 피해 신발도 못 신고 도망 나온 여자는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고 수치심에 몸을 사리게 된다.


  다친 여자에게 시선을 건넨 남자는 이미 골목 저편에서부터 들리던 여자의 우는소리와 아버지의 고함에 어느 정도 상황은 짐작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여자가 느끼는 수치심과 경계심을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남자는 다음날 용기를 내어 여자가 일하는 카페에 찾아가 약을 건네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머릿속이 하얘진다. 말을 잇고 싶지만 이미 남자의 용기는 한계에 다다라 일단 자리를 피한다.


  그 순간을 설명하고 싶어 매일을 견뎌내던 남자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여자의 카페에 찾아간다. 준비한 책을 펼치고 여자를 관찰하며 기회를 엿보는 남자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복잡하다.







  여자는 남자의 행동에 경계심이 풀리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열리는 마음을 느낀 남자는 다음 날 초저녁부터 꽃을 사들고 여자를 기다린다. 남자는 몇 시간 뒤 퇴근하는 여자를 발견하고 벽 뒤로 숨었다. 자신의 용기 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어금니를 물고 달려가 꽃을 건네는 데 성공한다.


  여자는 사실 이제 남자가 불편하지 않다. 상처 났던 얼굴에 바를 약을 건네준 남자의 용기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쑥스러워하던 매일같이 자신이 일하는 카페에 찾아와 얼굴을 내비친 남자의 노력이, 그의 마음을 받아내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그날 이후 남자와 여자는 하루가 다르게 깊은 사이로 발전한다.







  몸과 마음의 상처가 물어 가던 어느 날 여자는 알게 된다. 아버지가 동네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남자의 발자취를 쫓고 있음을. 찾아내면 몇 년 전 어느 남자에게 했던 것과 같이 돈을 달라고 할 거라고. 들어주지 않으면 딸을 다신 못 보게 할 거라고. 그때의 그 참아낼 수 없는 감정을 이번에는 더 깊게 느끼게 될 거라고.


  여자는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용기를 낸다. 남자를 만난 여자는 자신은 이곳을 떠나 멀리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고마웠고, 잘 지내달라는 가슴 아픈 거짓말을 건네고 뒤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여자는 생각을 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 남자에게 상처를 준 어린 날의 자신의 실수를 되새기며 남자를 추억하던 여자는 이제 더 성장했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지켜낼 만큼 강해졌다고 자부하지만 후회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의 부유 중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여자는 고개를 돌린다. 누군데 지금? 혹시 그 남자일까?


뮤직비디오 엔딩 장면


  뮤직비디오 한 편의 여운이,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인연이 있다면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만나리라. 괜스레 코 끝이 시큰해지려는 걸 참으니 웃음이 나왔다. 문득 이런 비슷한 느낌이 기억났다. 뭐였더라,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데 좀체 잡히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因緣)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가 있었다. 내가 아직 20대였을 때 보았던,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를 그린 영화 <첨밀밀, 1997>. 잠깐의 기억만으로도 감회가 새롭다.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1986년 홍콩, 중국에서 꿈을 아 온 '남자'(소군, 여명 분)와 '여자'(이교, 장만옥 분)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대만 최고의 가수 '등려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낯설기만 한 홍콩에서 서로 의지하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마냥 사랑만 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크다. 여자는 홍콩에서 돈을 벌어 본토에 있는 어머니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겠다는 꿈이 있고,  남자에게는 돈을 벌면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가 고향에 있다.


  그렇게 몇 번의 헤어짐과 사랑의 재확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을 갈라 놓는 운명때문에 서로 어긋나버린 인연이 아쉽다.


  그리고 10년 뒤 1995년 뉴욕, 이곳에서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는 여자는 쓸쓸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다가 한 전자상가에서 틀어놓은 TV를 통해 자신이 좋아했던 가수 '등려군'의 사망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멈춘다. 


  남자도 같은 시간 그 사망소식에 가던 길을 멈추고 상가 속 TV를 보고 있다. 곧 두 사람은 서로가 옆에 서서 같은 화면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서로가 좋아하는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환히 웃는다.

  

영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해진다.





  첨밀밀의 OST인 등려군이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을 오랜만에 들어 보았다.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이 노래를 통해 느껴졌다. 그래도 마음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사춘기의 소년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시간은 훌쩍 나이를 먹어 지금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무슨 부끄러운 짓인양 고개를 돌리게 만들지만, 신기하게도 과거의 감정은 그대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배우들의 감정선이 여전히 가슴 시리도록 저려왔다.


  사람에게 추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꽃처럼 화르르 타오르는 염원아니다. 그것은 눈 쌓인 거리를 걸을 때면, 고요한 음악을 들을 때면 잊힐 듯 잊히지 않고 생각나는 기억의 조각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결코 바뀌지 않는 시간대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마치 원하면 언제든지 꺼내어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말이다.


  추억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현실과의 괴리감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닿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자 홀로 고여있는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한다. 손가락 틈새로 모래는 끝없이 새어 나간다. 다음에 모래사장을 찾았을 때 우리는 그때 그 모래알들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뇌리에 박힌 선명한 금빛 기억들은 모래사장을 여전히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금빛 기억들로 여전히 아름다운 내 추억 속 모래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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