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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이 길을 왜 걸어요?, 추자도

by baekja

20대 중반, 대학생, 사학과, 여행과 답사를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이 마냥 즐거운 사람. 어떤가요? 좀 괜찮은 사람 같아보이나요? 그럼 확실하지 않은 대학원을 꿈꾸며 특출난 스펙 하나 없는 20대 중반의 백수.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고 등짝 한 대 때려주고 싶지 않나요? 누군가는 젊음은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할지도 모릅니다. 높은 이상과 무한한 가능성 뒤에 절망적인 현실의 벽과 캄캄한 미래가 숨어 있는 흔히 청춘이라 불리는 저의 현 상황입니다.


앞에 말한 저의 상황처럼 추자도 올레코스 완주는 불안 요소가 가득했습니다. ‘바람이 허락하는 섬’이라는 별칭을 가진 섬답게 배편이 자주 통제되었기 때문이죠. 저와 제 친구들도 예상했던 날에서 이틀이나 기다리고서야 추자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들어갈 때도 바람이 강해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는 동안 멀미를 심하게 했습니다. 내리고 나서도 처음에는 어질어질하더군요. 10시 40분쯤 상추자항에서 내리자마자 추자도 제주올레 공식안내소부터 찾았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올레지기에게 질문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정신없어 보이는 올레지기의 모습을 뒤로하고 저는 올레 18-1코스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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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오른쪽에 사람이 모인 곳이 제주올레 공식 안내소입니다 우측: 상추자항에서 내려 처음 보게 되는 추자도 풍경

무릎이 안 좋아 친구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걸으며 살펴본 추자도의 모습은 무척 독특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추자도는 제주의 여느 섬들과는 달리 화산섬이 아니고 해남에서 이어지는 산맥의 일부가 바다 위로 튀어나온 섬이기 때문에 현무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섬입니다. 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해녀 문화를 공유하고, 해신당이 존재하는 등 제주와의 연결성도 있지만, 제주와 멀리 떨어져 있어 4·3사건의 피해는 입지 않은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 풍경과 문화적 경관 모두 제주와 육지 사이 경계에 있지만, 그래서 더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20210130_105144.jpg 상추자항 바로 옆의 추자초등학교


올레길 시작점을 나와 최영장군 사당을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봉글레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잠시 서서 맑은 날의 상추자도와 바다를 한 번 쭉 둘러봅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상추자항이 위치한 대서리로 내려와 영흥리로 넘어갑니다. 영흥리 마을에서 박씨처사각 옆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절기미절골절벽이 나타납니다. 깎아 지를듯한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조그마한 무인도들과 하늘 위에 걸린 구름, 옅은 군청색을 띄는 하늘아래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과 시원한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가 한 번에 전부 눈에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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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붕글레산 정상 우측: 절기미절골절벽에서 보이는 풍경


아슬아슬한 절벽 위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하얀색 추자등대가 봉우리 위에서 올레꾼들을 맞이합니다. 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하추자도가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낮지만 굴곡진 봉우리가 이어지는 추자도의 모습에 감탄한 후 등대에서 내려오면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교가 등장합니다. 세찬 파도 위를 걸어가는 기묘한 느낌을 받으며 상추자도에서 하주자도로 건너갑니다.


20210130_113109.jpg 추자등대
20210130_113311.jpg 추자등대 위치에서 보이는 하추자도


하추자도에서 숲길을 조금 걸으면 발 아래로 묵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묵리어촌계 앞에 있는 해녀문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인증서를 보고 제주의 향기를 살짝 머금고 묵리 마을을 지나면 잠시 후에 신양항에 도착합니다. 상추자항보다 넓지만, 사람이 없어 한적한 신양항을 슥 둘러보고 멀리서 모진이 몽돌해안에 시선을 주고 돌아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황경한 묘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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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신양항과 마을의 모습 우측: 묵리 마을 전경


천주교 성지인 이곳의 깔끔한 모습에 놀라며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을 바라봅니다. 소나무와 구름, 바다가 이루어진 풍경에 경탄합니다. 황경한 묘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면 신양리를 넘어 예초리에 도달합니다. 예초리에 도달한지 몇 분, 정말 추자도의 42개 섬으로 이루어진 멋진 해안 절경을 볼 수 있는 예초리 기정길에 도착합니다. 어느 때는 나무로 둘러싸인 녹색 터널에 감탄하고 어느 때는 나무들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추자도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며 길을 걸으면 예초리 마을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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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예초리 기정길에서 보이는 해안 절경 우측: 황경한 묘 앞의 풍경


이제 예초리 마을에서 추자도에서 가장 높은 돈대산 정상을 향해 갑니다. 숨이 살짝 차오를 무렵 추자도의 모든 모습이 한 눈에 담기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말을 잃고 핸드폰 사진기와 눈에 당장 느껴지는 그 모든 장면들과 감정들을 담으려 노력합니다. 이제는 추자도의 올레코스를 마무리하며 천천히 상추자항으로 돌아갈 시간, 돈대산을 내려가는 저를 한 중년의 남자 분이 불러 세웁니다. 늘 그렇듯 어디서 왔냐고 묻고, 올레길을 걷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합니다. 그리고 나오는 예상치 못한 질문.


“이 길을 왜 걸어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질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다 어떻게든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질문은 내내 제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담수장을 지나 다시 추자교를 건너고, 영흥리를 거쳐 대서리의 상추자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질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어서야 한 가지 답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확정된 것 없는 불안한 미래 앞에서 제대로 된 노력 하나 하지 못했던 제 무능함에 대한 조그마한 증명이 제가 길을 걷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미 3코스에서 무릎을 다쳐 양쪽 발에 발목 보호대, 왼쪽 무릎에는 무릎 보호대를 계속 끼고 걸어야 했고, 저녁과 아침마다 매일 파스를 뿌려야 했습니다. 우도에서는 큰 배탈이 났는데도 버스나 택시 한 번 안 타고 꾸역꾸역 다 걸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올레길을 정식으로 완주하고 싶었던 것은 늘 의지박약이라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낸 적 없는 제가 여기서도 포기하면 제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못 박아 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나를 내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믿어주기 위한 증명으로 이 길을 끝까지 걷고 있다는 생각이었죠.


20210130_143807.jpg 돈대산을 내려오며 마주한 풍경


그리고 올레 완주를 마치고 난 뒤, 올레길에 오기 전부터 올레 완주가 끝나고까지 계속 해 온 제주 공부를 생각하며 내린 결론은 제주를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제가 길을 계속 걸은 또 하나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제주에 한 달 정도 머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제주를 한 바퀴 통째로 돌면서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모두 내 기억 속에 쌓아둘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이번 생엔 지금 쓰고 있는 제주올레 완주가 마지막일지 모릅니다. 제주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 또한 제가 길을 걸은 원동력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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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론을 내린 두 가지의 제주올레를 걸은 이유를 뒤돌아보니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공감은 되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이유들이기는 했지만, 무언가 불안한 미래를 놔두고 취직 준비는 하지 않고 여행이나 다녀온 제 자신에게 하는 ‘변명’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족구왕>의 한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주인공(홍만섭)의 기숙사 룸메이트 형이 취직 준비는 안 하고 족구나 하러 다니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홍만섭, 너한텐 족구가 뭐냐?”

주인공은 짧게 대답합니다.

“재밌잖아요.”


이 다섯 글자의 짧은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에 찡하고 울리는 것이 있더군요. 그 다섯 글자가 제주올레길을 걸은 이유로 말하고 싶은 한 마디였습니다.


20대 중반의 대학생이 많은 것들을 팽개쳐두고 제주올레를 완주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해주겠지만, 누군가는 좋지 않은 시선들을 보낼 겁니다. “취직은 준비하고 있니?” “부모님에게 빌붙어 살면 안 된다.” “여행할 시간에 영어 단어나 하나 더 외우렴.”과 같은 말들이 뒤따라 올 수도 있습니다. 이 부정적인 시선들과 말들을 정면으로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완전히 틀리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합리화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유들을 꺼내들었습니다. 이 이유들은 이해는 되지만, 저조차도 공감할 수는 없는 이유들이었습니다.


사실 답은 무척 가까이 있었습니다. 추자도, 아니 제주올레길의 무수히 많은 장면들을 보고 느낀 제 자신에게 있었죠. 불안한 미래에 갈팡질팡하며, 끝없는 고민에 어쩔 줄 모르고,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에 눈치를 보는 그런 제 자신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그냥 모르는 길을 무작정 걷고,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등 제주올레길을 걷는 것에 포함된 모든 과정이 즐거웠던, 즐거워서 계속하고 싶었던 아마 많은 이들에게 ‘청춘’이라 불리는 제 자신이 답을 쥔 채로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서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왜 이 길을 걸었어?”

그러자 환히 웃는 마음속 제 자신이 답합니다.

“그냥. 재밌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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