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매력적인 것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지는 노을과 분홍빛 하늘,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별, 눈이 내린 깊은 숲속의 침묵, 티없이 맑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 바람 가득한 평야, 명랑하고 밝은 새소리, 강에 손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신선함, 한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 등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롭고 매력적인 경험들을 쌓아갑니다. 이런 새로운 경험들은 자연이나 음식과 같은 것들을 통해 쌓을 수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쌓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말고는 접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 그 너머의 무엇을 만나는 듯한 흥분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시간 순대로 올레 코스를 지나며 만났던 기억에 남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올레길의 시작은 설레지만, 어색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도보 배낭여행에 길을 잃기 십상이죠. 가끔 올레길임을 알려주는 화살표나 리본이 보이지 않을 때면 무척 당황합니다. 저와 제 친구도 그랬습니다. 1코스 오조 해녀의 집에서 성산포로 향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여지더군요. 그래서 멈춰서서 지도를 살펴보는데도 어떤 곳이 맞는 길인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그걸 지켜보시던 부부로 보이는 할망, 하르방께서는 저와 제 친구가 가고 있던 방향으로 가면 길이 막힌다며 정확한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불안했는지 우리가 맞는 방향을 잡고 제대로 갈 때까지 몇 번이고 소리쳐서 길을 가르쳐주셨죠. 배낭여행 초행길에 느끼는 사람의 따뜻한 정에 무척 감동했습니다.
원래는 우도를 갔어야 하는 둘째 날, 폭설이 내리고 풍랑주의보가 떨어져 계획을 바꿔 21코스를 걷기로 했습니다. 지미봉에서부터 종달리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에서 한 중년 올레꾼 부부를 만났습니다. 제가 지미봉에서 썰매를 타듯이 내려오면서 눈을 치워주고 계단을 보여준 것이 고맙다고 얘기를 꺼낸 부부께서는 저희가 30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꺼번에 올레코스를 완주한다고 하자 자신들은 시간될 때마다 코스를 골라 조금씩 걷는다면서 젊음이 무척 부럽다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중년이 되어서도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올레길을 걷는 여행을 할 수 있는 당신들이 부럽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거친 눈보라 속에서 체력이 약한 아내의 짐을 남편이 들어주며 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제가 미래에 갖고 싶은 삶의 모습 중 하나였습니다.
제주에 눈이 무척 많이 쌓여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제가 제주를 방문했을 때는 폭설이 사흘 내내 내렸는데 해가 뜬지 사흘 만에 거의 다 녹았습니다. 제주에 사는 아이들에게 그 얼마 안 되는 기간은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쓸 수 없는 신기한 장난감이 온 세상에 가득한 시간입니다. 온평리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은 추운 날씨에도 눈이 가득 쌓인 마을길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얼 하며 놀고 있나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쑥스러워하며 대답을 피하더군요. 하늘에서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눈의 순수한 모습과 아이들의 숫기 없는 순수함이 겹쳐 보이며 ‘과거의 나도 저랬겠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몰려와 잠시 아련한 미소를 지었었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으로 천국을 선사하고 미끄럽고 힘든 길로 지옥까지 선사한 3코스가 끝나고 표선면에 있던 흑돼지집을 방문했습니다. 매일 컵라면만 먹는 저를 위해 친구가 한턱 쏘기로 한 것이죠. 정말 기록적인 폭설이긴 한가본지 식당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이 정도 폭설이 몇 년 만인지에 관해 얘기하고 계셨습니다. 그걸 흥미롭게 듣고 이제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가 귤 먹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제 친구는 흔쾌히 귤을 달라 그랬습니다. 많아야 두세 개 줄줄 알았는데 봉지에 귤을 가득 담아 주시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친구와 숙소에 들어가 귤을 까먹으면서 제주의 정이 정말 넘쳐흐른다고 기분 좋게 대화를 했었습니다.
4코스는 무척 힘겨웠습니다. 3코스에서 다친 무릎으로 인해 속도는 느렸고 다리에서는 통증만 느껴졌죠. 그렇게 힘들게 4코스 종점 남원포구의 제주올레 공식안내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죠. 그곳에서 남은 계획을 위해 올레지기 분께 질문을 몇 개 하고 친절한 대답을 들은 후 나오는데 어떤 분들이 인사를 하더군요. 친구가 반가이 인사를 하길래 저도 따라하고 나중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21코스에서 만난 부부라고 해서 무척 놀랐습니다. 한 번 만나고 스쳐갈 인연인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무척 신기했습니다. 그 후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지금쯤은 올레길을 다 완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올레길을 걷다가 아마 대부분 한 번 쯤은 화장실 문제에 봉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5코스 중간부터 배가 안 좋더니 신례2리에 다 와서는 화장실이 급했죠. 그래서 화장실을 찾는데 다른 올레꾼 아주머니 두 분도 화장실을 찾는 것이 보였습니다.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동질감을 강하게 느끼며 화장실을 찾았는데 아주머니가 먼저 찾고 알려주셔서 저도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습니다. 공중화장실인줄 알고 썼는데 볼일을 보고 나오면서 그곳이 옆 카페의 화장실이란 것을 알게 돼서 민망했습니다. 민망해도 시원함을 느끼면서 감사함을 표시하려는데 이미 멀리 가버리셔서 감사 인사는 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올레길에서 낯선 이와의 내적 친밀감이 가장 강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길을 가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인사를 받아본 적 있나요?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리라 생각하지만, 밝은 어조의 인사를 받으면 저는 무척 기분이 좋아집니다. 7코스 논골을 지나 월평포구에 이르기 전 해안도로에서 여성 두 분이 저와 제 친구를 향해 무척 밝은 어투로 인사를 하셨습니다. 올레길을 걷다 갑자기 인사를 받아본 적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깜짝 놀라서 재빨리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몹시 당황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아무 상관없는 제게 인사를 해준 두 분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힘든 올레길, 그저 이유 없이 걸었을 인사 한 번에서 올레꾼 또는 여행객 사이에 통하는 따뜻한 정 같은 것이 느껴져서 저는 더 즐겁고 힘차게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척 짧은 9코스를 마치고 저는 잠시 올레길에서 벗어나 대정현성, 대정향교와 하멜 기념관을 갔다 왔습니다. 하멜 기념관은 열려 있지 않아 가보지 못했고 근처 산방산 앞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강한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갑자기 웬 영어가 들리더군요. 백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그리고 딸로 보이는 3인 다문화 가정이 도라에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백인 남성은 도라에몽이 뭐냐면서 그게 어떻게 유명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국인 여성이 두리번거리더니 저를 딱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Ask him." 영어를 잘 못하는 저는 잔뜩 겁먹어 가지고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저에게 진짜로 묻지는 않았습니다. 올레완주 여행 중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다시 상상해도 끔찍합니다.
올레길을 자신의 반려동물과 같이 걷는 상상해봤나요? 13코스에서 그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숲길에서 나와 아홉굿마을로 가는 찻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반려동물인 개와 같이 찻길을 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등산복입고 자전거타는 할아버지와 그 자전거만한 덩치를 가진 개가 함께 가는 모습은 생전 처음보는 장면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별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빠른 속도로 제 옆을 지나갔지만, 강아지와 할아버지가 가끔 눈을 맞추는 모습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사람과 반려동물 사이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할아버지와 개의 관계를 ‘좋은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겠죠. 보는 이가 다 행복해지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14-1코스를 완주하고 저지리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오설록 티뮤지엄에서 820-2번 버스를 탔습니다. 820번대 버스는 제주관광지순환버스라 그런지 안내원 분이 타 계셨습니다. 예전의 버스 안내양 같은 분이라기보다 관광지순환버스 안에서 질문을 하면 제주 관광 코스를 추천해주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딱히 뭘 물어보지 않았지만, 무얼 볼지 고민하는 관광객들에게 친절한 말투로 무수히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시더군요. 친절한 말투를 들으니 저 또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아마 제주 곳곳에 관광객이 많아지는 것은 이런 분들의 노력이 한몫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4코스 종점 한림항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두고 하나로마트에서 점심을 사서 오는 길에 호떡과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서 싸늘한 몸을 데우려고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어묵국물을 먹었습니다. 조용히 어묵을 먹는데 옆에서 주인장이랑 주인장 친구 분이 막 수다를 떠셨습니다.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 사투리여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제주 올레를 완주하면서도 그 정도로 강렬한 제주 사투리를 들을 일이 없었기에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쯤 되어서는 제주올레를 걷는 게 무척 익숙해져서 머리로는 제주임을 알아도 제주인 것을 진심으로 느끼는 순간은 많지 않았는데 정겨운 사투리를 듣는 순간에는 이곳이 제주 깊숙이 묻혀있던 향토적인 냄새를 맡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행지에 와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때만큼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올레길을 거의 같이 완주한 친구 A, 일주일 정도 같이 걷기로 한 친구 B와 15코스 종점 고내포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제주에 볼일이 있어 방문한 친구가 저와 친구 A, B를 만나기 위해 반대편 표선면에서 차를 몰고 고내포구까지 와주었습니다. 저와 친구 A, B, C가 만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기에 제주의 바다와 맛있는 음식을 보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구 C가 우리와 바닷가 산책을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야?”
“글세…….”
“나는 지금 이 순간.”
조금 오글거리고 남사스러울지 몰라도 기분은 무척 좋았습니다. 좋은 사람과 보내는 좋은 시간을 되새기며 당장의 행복함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이전에 가지 못했던 우도의 1-1코스를 완주하고 성산포항에서 제주시에 있는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한 버스가 멈추어 섰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기다리는 버스는 아니라서 가만히 서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버스기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거 제주도 가는 버스인가요?”
버스 기사님의 우문현답.
“여기가 제주돈데요.”
우도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던 몇 십 명의 관광객이 한 번에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질문을 하신 아주머니는 부끄러워 보였지만, 말을 바꿔서 다시 물어보셨고 기사님은 친절히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여행을 하며 봤던 돌발적인 장면들 중 가장 웃긴 장면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18코스를 완주하는 날, 연북정 쯤부터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종점까지 오는 1km동안 저와 제 친구는 쫄딱 젖었습니다. 몸을 말리려 올레꾼들의 쉼터 제주올레 공식안내소로 들어갔죠. 안내소 안에 계시던 올레지기께서는 저희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귤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귤을 까먹으면서 안내소를 구경하는데 <올레길에서 자주 만나는 들풀·풀꽃>이라는 소책자가 보였습니다. 너무 갖고 싶어서 파는 곳이 없냐고 물어봤더니 없다면서 안내소에 몇 권 있다고 그냥 한 권을 무료로 주셨습니다. 예쁜 그림과 함께 올레길에서 볼 수 있는 들풀과 풀꽃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겨울인지라 당시에는 쓸 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올레길을 걷게 된다면 꼭 올레지기 분의 친절이 가득 담긴 이 책자와 함께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배편 통제 끝에 추자도에 간신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속도가 빠른 친구 A를 먼저 보내고 다리가 아팠던 친구 C와 D는 상추자항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혼자서 18-1코스를 완주하게 되었죠. 가는 도중에 한 중년 올레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통화를 하고 계셨는데 나중에 속도가 계속 바뀌어서였는지 몇 번을 더 보게 되면서 대화를 좀 했습니다. 한라산 등반을 했던 이야기, 올레길을 어떻게 완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친구와 같이 다니며 다른 올레꾼들과 길게 이야기를 할 일이 없었는데 간만에 처음 보는 올레꾼과 이야기를 하니 무척 신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상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건강한 올레꾼의 체격과 웃는 얼굴, 긍정적인 말투는 여전히 제 여행 추억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게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조그만 대화로도 여행의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좋은 예시인 것 같습니다.
제주시의 숙소에서 숙박을 끝내고 짐을 챙기고 나와 20코스의 시작점인 김녕서포구로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잘 가던 버스가 갑자기 갓길에 멈추어 섰습니다. 기사님께서는 경고등을 켜고 버스의 엔진이 고장 났다며 다음 버스를 타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부터 나오더군요. 기사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안내 덕에 별 사고 없이 다음 버스로 잘 갈아타기는 했지만, 여행에서 어떤 변수든 일어날 수 있으니 늘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뼛속 깊이 새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길고 긴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곳에 다 적지는 못했습니다.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적을 수도 없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전부 기억하지도 못할 테죠. 아마 지금 이 글에 적은 만남과 사건도 조금 있으면 제 기억에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하나하나의 순간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가진 만남은 무수히 뒤섞인 우연과 필연 속에서 지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일어난 것일 테니까요. 그렇게 낮은 확률을 뚫고 이루어진 소중한 만남인 만큼 상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제 마음속에는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영겁의 시간동안 남아 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