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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숙소

by baekja

보통 쉬러 가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먹거리와 좋은 숙소 그리고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통수단과 충분한 즐길 거리와 볼거리겠습니다. 올레길 완주에서 교통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만 필요하고 즐길 거리와 볼거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으니 먹거리와 숙소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될 듯합니다. 하지만, 돈 없는 대학생이 먹거리와 숙소를 풍족하고 윤택하게 선택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식사는 컵라면과 삼각김밥이었습니다. 올레길에는 할망 숙소라는 정말 좋은 숙소가 있지만, 이에 대해 잘 몰랐던 저와 여행을 함께한 제 친구는 모든 숙박을 게스트하우스와 모텔, 펜션에서 해결했습니다. 되게 재미없는 숙박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와 제 친구가 세운 단 한 가지 원칙 덕에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숙박은 코스의 종점과 시작점 근처에서 묵는다는 원칙이었지요.


1,2코스 숙박에서 무난하고 편하게 잘 쉰 저와 제 친구는 제주에서 폭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적설량은 약 30cm. 저희 앞에 있는 것은 올레길에서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3-A코스였습니다. 결국 걷는 과정에서 저는 무릎까지 다치기는 했습니다만, 완주에는 간신히 성공했습니다. 무려 7시간이 걸렸죠. 평균 시속 4~5km로 늘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도착한 표선 해수욕장의 한 모텔의 첫인상은 정말 별로였습니다. 로비 대리석이 전부 얼어서 몇 번을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데다 화장실은 바람이 솔솔 새는지 온수가 나오는 데도 몸을 덜덜 떨렸고 와이파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피곤하고 지칠 대로 지쳐서 그냥 쓰러져 자기는 했지만, 친구는 여행 중 최악의 숙소로 이곳을 뽑았습니다.


5코스 종점인 쇠소깍 다리 근처의 펜션은 펜션 마당을 가득 메운 귤나무들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딱 밀감이 제철이라 귤나무마다 매달린 귤들이 매우 탐스러웠지요. 체크인하고 들어갈 때도 귤을 몇 개 나누어주셔서 정말 좋았는데 들어가니 귤이 한 20개쯤 바구니에 있더군요. 그것도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셔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에는 없는 비타민C를 보충해야 한다며 친구랑 농담을 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제철에 제주도에서 막 딴 귤은 사탕보다 달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여태까지 먹었던 어떤 귤보다 달더군요.


앞의 펜션이 귤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8코스 종점 대평포구에서 묵었던 숙소는 사장님의 통 큰 서비스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장님이 방이 남았다며 2인실을 10인실로 바꿔주시더군요. 10인실이 어느 정도냐면 그냥 30평 아파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0평 아파트에서 두 명이 묵는 행복이란. 두 명이서 묵는 숙소에서 화장실 두 개 써보셨나요? 안 써보셨으면 말을 하지 마십쇼. 가격은 인당 25,0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정말 횡재한 기분이었습니다.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나올 때 사장님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코스 종점 용수포구 바로 옆에는 숙소가 없어 약 1km 정도 떨어진 게스트하우스와 펜션을 섞어놓은 듯한 숙소에서 묵었습니다. 일단 여기는 찬물밖에 안 나왔습니다. 한겨울에 얼음장 샤워라니.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주인장이신 할머니께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무척 좋았습니다.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개도 무척 귀여웠고요. 세탁기를 쓸 수 있다 해서 세탁기를 썼는데 야외에 있는데다가 물이 샌다고 해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래도 옷은 깨끗이 세탁되어 무척 만족했습니다. 저는 여행 중에 아침을 안 먹었지만, 친구는 아침을 먹었는데 아침이 공짜로 나오는 숙소여서 친구도 꽤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20210120_154008.jpg 숙소에서 바라본 용수포구의 모습


13코스 종점 저지리는 숙소를 찾기 매우 힘들었습니다. 민박이야 몇 군데 있지만, 모텔, 게스트하우스, 펜션은 없는 듯하여 예약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센터라는 곳을 찾아 묵게 되었는데 취사되고 온수도 잘 나와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저지리 근처에서 묵는 사람이 없는지 사람이 무척 없고 게스트하우스 식이라 자는 방에서 화장실이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무척 무서웠습니다. 14-1코스를 돌고 묵는 날은 친구마저 일이 있어 서울로 올라가 혼자 남아 공포에 떨어야했습니다. 깊은 산속인 저지리라 그런지 정말 귀신 하나 나올듯한 부위기가 풍겼습니다. 귀신은 만나지 않고 저지리를 빠져 나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8코스에서 묵은 펜션도 넓어서 좋았지만, 저는 아직도 15코스 종점 고내포구에서 묵었던 호텔을 잊지 못합니다. 돈도 없는 대학생이 무슨 호텔이냐고요? 예, 코로나와 겨울이라는 비수기를 맞아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쌌습니다. 베란다 문만 열면 야외 온수풀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겨울왕국 키즈룸을 예약했는데도 인당 3만원이 안되었습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인당 25,000원의 숙소 비용을 썼던 것을 생각하면 비싼 것은 아니었죠.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Dear, My Blue라는 독립서점을 들어가서 서점주인 분과 대화를 잠깐 했었습니다. 서점주인 분께 올레길을 걷는다 하고 호텔이름을 숙소로 말하니 주인 분이 의아해 하시더군요. 제가 다 당황했는데 지금 가장 싼 방이 7만원 넘는 걸 보면 그럴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왕국 키즈룸으로 굳이 예약한 것은 제가 겨울왕국을 좋아해서……. 크흠. 당시 겨울왕국 그림이 그려진 침대에 누워서 웃는 저의 사진을 보면 무척 행복해보입니다. 과거의 나, 행복해서 다행이야. 밤에는 온수풀에 발 담그고 막 새로 합류한 친구(계속 같이 다닌 친구랑 다른 친구)랑 애월의 야경을 보면서 떠들었던 것이 아직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Inked20210124_150312_LI.jpg 겨울왕국 키즈룸


마지막으로 소개할 숙소는 올레꾼에 최적화된 최고의 숙소입니다. 제가 앞에서 무릎을 다쳐 친구가 7-1코스를 도는 동안 하루 쉬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탓에 저는 완주를 하기 위해서 7-1코스를 마지막 날에 따로 돌아야했는데 그 탓에 서귀포에서 2박 정도를 따로 해야 했습니다. 제가 서귀포에서 선택한 숙소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올레스테이’였습니다. 빨래 서비스가 있고, 깔끔한 라커와 푹신한 침대, 세련된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올레 스테이는 올레꾼들을 위한 숙소 그 자체입니다. 아침에 올레길을 나갈 때 길을 알려주시는 올레지기 분들의 배웅 또한, 올레스테이의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이죠. 저는 라커를 쓰려다가 계속 실수를 해버려서 직원분이 두 번이나 올라오셔서 도와주셨는데 계속 웃는 낯으로 괜찮다고 해주시고 숙소에서 체크아웃할 때는 다음에 다시 오라는 말씀까지 해주셔서 무척 감동했습니다.


추억이 많은 숙소들을 골라 글을 쓰기는 했지만, 모든 숙소들이 아직 제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14코스의 담배냄새 짙게 배긴 한림항 근처의 모텔이나 가장 길게 묵었던 17코스 종점 근처의 산지천 옆의 숙소 등 다양한 숙소들이 제 추억저장소에 담겨있지요. 다양한 숙소에서 다양한 추억을 남길 수 있어 참 좋았지만, 할망 숙소에서 묵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음번에 올레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꼭 할망 숙소에서 묵어볼 생각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여행에서 묵었던 숙소는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아니면 짜증이 나셨나요? 그 모든 경험들이 여행이라는 일상과는 다른 상황에서 저처럼 여러분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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