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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길에 정들다, 완주

by baekja

걸어서 제주 한 바퀴, 말만 들으면 썩 쉽지 않아 보이는 그 여정이 끝난 것은 2021년 1월 31일이었습니다. 시흥리에서 시작한 여정은 원래라면 종달리 앞바다에서 끝나야했지만, 악천후로 인한 일정변경 등으로 한 바퀴의 끝은 제주해녀박물관 옆 제주올레 공식안내소가 되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해 온 친구 A와 부둥켜안았습니다. 중간에 합류해서 일주일 정도만 함께한 친구 B와 친구 D는 옆에서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무척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아직 하나의 코스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20210131_152102.jpg 제주해녀박물관 옆 제주올레 공식안내소


무릎을 다쳐 쉬는 동안 친구 A는 이미 7-1코스를 돌았었고 저는 아직 7-1코스를 돌지 못해 다음 날 혼자 돌아야 했습니다. 제주 한 바퀴는 이미 돌았지만, 제주올레를 완주는 아직 하지 못한 셈이었죠. 친구들과 헤어진 후 해녀박물관을 구경하고 세화리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아직 완주를 하지도 못했는데 마음이 뒤숭숭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별로 없는 버스 창가에 앉아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바뀌는 제주의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산일출봉이 나타나고 이후에는 온평리가 나타나더니 표선해수욕장을 지나고 남원포구를 지났습니다. 마치 1코스부터 서귀포에 이르는 6코스까지를 되짚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래지 않은 과거가 무척 아련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발 끈을 동여맨 채로 길 위에 섰던 그 설렘과 코스를 지날 때 느꼈던 기억과 감정이 제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20210131_155910.jpg 버스에서 본 성산일출봉


이런저런 회상을 하다 보니 1시간 정도 버스에 있다가 내렸는데도 전혀 지루한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서귀포시 버스정류장에 내려 천천히 걸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약 3주 전에 6코스의 종점으로 마주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은 모습에 알 수 없는 안심감을 느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완주를 앞두고 마음이 계속 뒤숭숭하여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는지 숙소의 편안한 분위기에 쉽게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경 올레지기 분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갈 때는 오히려 별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1월 6일부터 매일하던 가방을 메고 길을 나가는 날들의 또 다른 하루일뿐이었죠. 그저 습관적으로 짐을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방수커버를 가방에 씌우고, 손에는 우산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그런 평범한 26일의 시작들 중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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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여행자센터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우측 : 서귀포버스터미널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서귀포 버스터미널의 제주올레 공식안내소 앞에서 내린 후 제주올레 완주의 마지막 날 일정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걸어 서귀포 신시가지 뒤쪽으로 넘어가 고근산으로 향하는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쯤 걷자 엉또폭포가 보였습니다. 전날 밤 호우주의보가 내려서 그런지 멀리서도 엉또폭포의 힘찬 물줄기가 보였습니다.


20210201_094925.jpg 저 멀리 엉또폭포가 보이나요?


옆으로 나무들이 잔뜩 있는 나무 데크를 지나 나뭇잎 사이로 엉또폭포의 장대한 풍경이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순간 저는 그저 와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엉또폭포만 보며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계시던 여행객 분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에게 올레길 걷고 있냐는 중이냐고 묻고, 제가 그렇다고 답하니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올레길 어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주의 매력을 정말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길이에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필요 없는 정보들만 잔뜩 쏟아 놓게 될 것 같아 다음 한 마디로 말을 줄였습니다.


정말 좋아요. 꼭 한 번 걸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렇게 짧은 답을 하고 엉또폭포에서 돌아서면서 문득 제 자신에게 다시 묻게 되더군요. 내 올레길은 어땠냐고. 그러면서 걸음 하나에 추억 하나씩을 떠올리며 올레길을 천천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코스부터 21코스까지 저의 마음을 움직였던 즐겁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습니다. 그런 사색을 하면서 7-1코스를 천천히 걸으니 고근산과 하논분화구를 지나 7-1코스의 거의 마지막 경유지인 걸매생태공원에 도착했습니다.


20210201_095659.jpg 엉또폭포


걸매생태공원에 도착하자 서귀포의 구시가지에 들어왔다는 것을 머리로는 몰라도 몸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몇 번 씩 다니며 맡아 본 익숙한 공기와 몸을 편안하게 하는 익숙한 분위기가 이곳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근처임을 말하고 있었죠. 천천히 걸매생태공원을 걸으며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가슴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눈가는 촉촉해졌습니다. 해냈다는 성취감 너머에 숨겨진 강렬한 감정이 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아쉽다. 헤어지기 아쉽다.’


저는 그만 올레길과 정이 들어버린 것이죠. 길을 다니며 조우하게 된 모든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이 있던 길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날씨, 역사나 종교와 같은 인문학적 이야기, 식물과 동물 같은 정감 가는 생물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 문화적 경관과 길 위에서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정이 들지 않고 어찌 배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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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걸매생태공원 우측: 서귀포 구시가지


찰나와도 같은 생태공원에서의 산책이 끝나고 너무나도 잘 아는 서귀포 구시가지의 골목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골목이 끝나자마자 제주올레 여행자센터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1월 5일 제주에 비행기로 도착한 날부터 시작된 28일 26코스 425km의 여정이 끝난 것이었죠. 여행자센터에 들어가 도장을 다 찍은 올레 패스포트를 내밀고 완주 인증을 한 다음 완주 증서와 메달을 모두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죠. 그 순간 여행자센터 1층에 앉아 있던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고 감격했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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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완주인증서를 받은 올레 패스포트 우측 : 완주 메달


그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고 마치 꿈같았던 일정은 진짜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저는 씻고 점심을 먹고 그냥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 제주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해냈다는 성취감과 무수한 이야기들이 제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아 무척 좋았습니다. 무릎을 삐고 배탈이 난 상태로 어떻게든 완주하고 한 순간도 제주의 이야기와 모습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 제 모습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제 올레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여전히 올레길에 정을 너무 많이 주어서 그 행복한 추억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행복이 있기에 삭막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버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이 조금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이제 잠시 제가 사랑하는 그리고 깊게 정든 올레길의 이야기들과 잠시 헤어질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여러 다른 이유로 여행길에 올라서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이 올레길이든 아니든 당신이 선 그 길이 새로운 경험이 가득하고 즐거운 추억이 수없이 남는 정든 길이 되기를 바라며 제가 좋아하는 페퍼톤스의 <행운을 빌어요>의 가사로 완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뒤돌아 서지마요

쉼없이 달려가요

노래가 멈추지 않도록

수많은 이야기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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