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꽃

경회루(慶會樓), 수정전(修政殿)

by baekja

흥복전에서 나와 남쪽으로 향하면 담장이 있습니다. 그 담장을 서편으로 돌아 나오면 경회루의 옆모습이 보입니다. 경복궁에서 가장 화려한 경회루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경회루 북쪽 담장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육모지붕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소담하고 퍽 귀여워 보이지만, 담장과 함께 보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정자가 조선시대부터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정자의 이름은 하향정(荷香亭)으로 ‘하향(荷香)’은 연꽃 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향정은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것으로 이곳에서 낚시를 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 6.25전쟁의 발발을 보고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것은 1959년으로 추측되어 그냥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적인 사유인 낚시를 위해 세운 것은 사실이라 논란이 되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관련이 전혀 없는 건물이라 아마 지금 세웠으면 문화재청과 시민들이 난리가 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때는 문화재 보호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히지 않은 때라 별 생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세워져서 지금까지 왔고, 지금에야 논란이 되고 있지만, 경회루의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는데다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건물이 되어버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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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정에서 눈길을 돌려 경회루를 봅니다. 여름날, 경회루의 서면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이파리와 서편의 섬 두 곳에 서 있는 소나무들이 옆모습을 살짝 가립니다. 조선시대에 한반도에서 제일 컸을 환상적인 누각은 가지와 잎 사이로 그 모습을 언뜻 비춥니다. 장성한 나무들도 다 가리지 못하는 장대함에 놀라고, 장대함 사이에 숨어든 선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에 또 한 번 놀랍니다. 바람이 안 부는 햇빛 쨍쨍한 날이면, 경회루의 모습이 연못에 거울같이 비추어 아름다움이 배가 되었을 텐데 날씨가 좋지 않은 터라 그 모습은 보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버드나무를 따라 연못 주위를 돌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연못과 경회루는 누가 세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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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는 태종 때 만들어졌습니다. 태종 12년(1412), 경회루 자리에 있던 누각이 기울어지자 태종은 급히 수리를 맡겼습니다. 주변이 너무 습하여 또 기울어질 것을 염려한 박자청은 아예 연못을 크게 파고 그 위에 섬을 만들어 큰 누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경회루입니다. 연못을 만들면 지반이 더 약해질 것 같지만, 아예 연못을 만들어 수분을 그쪽으로 빼버리고 나머지 지반은 단단하게 한다는 역발상으로 경회루를 만든 것이죠. 이런 기술이 있었기에 박자청은 천한 신분으로 조선 초기 궁궐과 왕릉 공사를 도맡아 했고, 그 공로로 정2품 공조판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누각에 이름을 붙여야 했습니다. 태종은 새 누각의 이름으로 경회(慶會), 납량(納凉), 승운(乘雲), 소선(召仙), 기룡(騎龍) 등을 내보이며 하륜에게 고르라 하였고, 하륜은 ‘경회’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기문(記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것이 경회루기≪慶會樓記≫입니다. 이 경회루기의 마지막에 사치스러움과 간사함을 피하고, 적절한 긴장감을 푸는 곳이라며 이 누각에 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시행하기를 권하고 있죠.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경회의 표면적인 의미만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며 나라를 다스리면 좋겠다는 조언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죠.


물론 의미야 좋지만, 경회루의 본질적인 용도는 안에서 연회를 여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의 주된 모토가 소박함이었다보니 화려한 경회루에서 맘껏 연회를 즐기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실록≫에서 태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中國)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를 삼고자 한 것이요, 내가 놀거나 편안히 하자는 곳이 아니다.”


즉,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장은 주 용도였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좋은 누각을 중국 사신이 올 때만 쓸 수는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도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연회만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걸어 다니며 경회루를 구경하는 것처럼 왕의 산책로이자 휴식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광을 모두가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경회루는 왕만이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어느 밤 당직하던 구종직이라는 관리가 신선세계 같다는 경회루가 보고 싶어 경회루로 몰래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밤 산책을 나온 세종과 딱 마주친 것이죠. 일단 세종은 이 관리를 보고 노래를 시켰습니다. 노래를 꽤 잘 뽑았던 모양입니다. 만족한 세종은 외운 경전이 있으면 읊어보라 했습니다. 구종직은 ≪춘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외웠고, 이에 세종은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술까지 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구종직을 홍문관 부교리로 임명하였습니다. 어이없는 상황에 관리들은 당연히 반발하였으나 ≪춘추≫를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는 구종직의 능력을 보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대에도 유명했던 경회루의 아름다운 풍광과 능력만 있으면 등용하여 조선 초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세종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경회루에 이렇게 좋은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회가 열리던 곳이다 보니 자연히 이곳에서 놀기만 하는 방탕한 임금도 있겠죠. 조선 최고의 폭군이라 불리는 연산군이 그 예였습니다. ≪연산군실록≫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경회루 못[池]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


““…경회루 연못가에 모옥(茅屋) 3칸을 짓고 울타리를 둘러치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음궁(淫宮)이라 일렀다.”


경회루 연못에 산을 만들고, 그 위에 모형 집을 만들어 천꽃으로 꾸미고 배를 띄운 후에 비단 연꽃과 산호수를 만들어 미녀들과 놀았으며, 아예 초가집까지 세워 그 안에서 즐길 것들을 다 즐겼음이 실록에까지 다 적혀 있는 것이죠. 고종 때 중건된 현재의 경회루와 달리 박자청이 만든 경회루는 좀 더 화려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저런 것들을 다 꾸며 놓았으니 참으로 볼만 했을 듯하나 그에 따르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얼굴이 찌푸려집니다. 실록의 말들이 어렵지는 않으나 흥청과 운평에 대한 부가 설명을 하면 연산군이 전국에서 모은 수천 명의 미녀들입니다. 이렇게 징집된 미녀들이 운평이었고, 그 중에서 더 예쁘거나 노래를 잘하는 자들을 가려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흥청망청이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흥청들에게는 모두 집이 제공되고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으니, 연산군의 사치를 알 만합니다.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회루는 사진으로 보기에도 화려합니다. 제가 처음 문화재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경회루 사진이 처음 이었습니다.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죠. 초등학교 5학년 처음 만난 경회루는 기대한 만큼의 아름다움을 제게 뽐냈고, 저는 늘 경회루를 아름다운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학교를 서울로 오고, 경복궁을 더욱 자주 방문하며 사시사철 경회루의 아름다움을 알아갔습니다. 수양벚나무가 피어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봄, 늘어진 버드나무 잎이 여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해주는 여름, 져가는 낙엽들이 어우러져 처연하고 우아함을 풍기는 가을, 모든 나무들이 옷을 벗고, 경회루의 장중함이 더해지는 겨울, 눈이 온다면 장중함은 깨끗한 백색으로 변모하여 부드럽고 밝은 경회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중 제가 좋아하는 것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입니다. 화려함과 화려함이 어우러져 더욱 그 느낌이 배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 화려함엔 가벼움이 아닌 무게가 있어 과하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봄의 가벼움과 화사함에 섞인 절묘한 묵직함이 제가 봄마다 경회루를 찾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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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에 취해 멈춰있던 발길을 돌려 경회루의 동쪽으로 가면 담장과 함께 문 3개가 있습니다. 이견문(利見門), 함홍문(含弘門), 자시문(資始門)입니다. 이 세 문은 각각 경회루로 이어지는 3개의 다리와 이어지며 그 중 이견문과 이어진 가장 남쪽의 다리에 어도가 있어 왕이 다녔던 것은 이견문으로 추측됩니다. 우리나라 누각이나 정자는 겉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들어가 앉아서 보는 풍경이 중요하다고 하죠. 지금 경회루는 예약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4월부터 10월까지이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가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저는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는데 무척 아름답더라고요. 저도 올해 안에 가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경회루의 동쪽 담장과 흠경각, 함원전의 서쪽 담장 사이에 난 길은 무언가 저를 빨려들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흙바닥 길 사이를 전부 막고 있는 높은 기와담장. 갈 수 있는 방향이 오직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그 길에 서서 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월이 멈춰버린 영원의 길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제는 잊힌 그 영원의 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무뚝뚝한 느낌으로 가는 방향만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길에 한동안 서서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놓인 초월적인 묘한 느낌을 받고 나면 경회루 구경이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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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에 이제 경회루 앞의 수정전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수정(修政)’은 정사를 잘 수행한다는 의미로 수정전이 많은 신하들이 사용했던 중심 건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종 4년)1867 재건된 채로 남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물은 그 이전 조선 초기부터 있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냥 있던 건물이 아니라 조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물이죠. 세종 때에는 이곳을 집현전으로 썼으며, 세조 때에는 집현전 출신들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자 장서각으로 바꿔버렸고, 성종 때에 이곳을 홍문관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에서 늘 들어온 이름들을 가지고 있던 수정전은 고종 때 재건된 후 또 하나의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됩니다. 갑오개혁의 중심부였던 군국기무처죠. 이처럼 수정전은 그 모습은 평범한 궁궐전각과 다를 바가 없으나 다양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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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까지 보았으니 이제 경복궁의 밖으로 나갈 차례입니다. 근정전을 둘러싼 회랑을 거쳐 들어왔던 문인 흥례문으로 나갑니다. 시각은 10시 30분, 이제 창덕궁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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