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무척 좋아합니다. 피자와 파스타를 먹을 때 피클과 같이 먹는 것보다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을 선호합니다. 느끼한 것을 먹을 때면 늘 김치를 찾고, 김치가 밥상에 없으면 아쉬움을 금치 못합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없으면 가장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음식은 김치입니다. 가족들이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지 우리 집 밥상에는 늘 김치가 올라오고, 김장하는 때가 되면 많은 양의 김치를 늘 담급니다. 주도하는 것은 어머니고, 시간이 남는 가족이 도와주는 형식이죠.
백수 아들이 집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어머니를 따라 장을 돌아다니고, 무거운 채소들을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김장하기엔 늦은 11월 말, 12월 초라 채소들을 구하는 것도 꽤 힘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근력운동을 따로 하지 않는 저로서는 채소들을 드는 것이 제법 힘이 들었습니다.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지만, 밤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오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시장과 마트를 오가며 쌓인 채소들을 김치로 바꿀 날이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아침을 먹고 나서 김장 준비를 조금씩 하시기 시작했고, 저는 아침 9시부터 나와 김장을 도와드렸습니다. 썰어두고 다듬은 채소와 각종 양념을 한곳에 붓고 섞었습니다. 무채가 주가 되는 김치속을 만들자 9시 30분이 좀 넘었습니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예약 주문해둔 절임배추를 가지러 마트로 갔습니다. 20kg 2박스, 새벽에 집 앞으로 배송된 20kg 2박스까지 합치면 80kg의 배추를 김치로 담가야 했습니다. 무거운 배추 박스를 들고, 차에 실은 뒤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박스를 집까지 들고 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수레를 가져오지 않아 사람의 힘으로 들거나 끌면서 가야 했는데 꽤 무겁더군요. 집의 현관문을 넘어섰을 때는 이미 지쳐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김장은 지금부터였습니다.
절임배추의 물을 빼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잠시 여유가 있는 동안 물을 마시고, 유튜브에서 노래를 튼 뒤 앞치마와 고무장갑으로 무장을 하고 구석에 앉았습니다.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페퍼톤스의 <행운을 빌어요>. 빠르고 편안하게 끝내려면 행운이 필요한 오늘의 김장에 딱 맞는 노래였습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속을 배추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간만의 작업에 흥미가 느껴졌지만, 단순 노동이 그렇듯 흥미는 사라지고, 생각이 점점 없어지며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루함은 노동이라는 상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불러왔고, 하얀 배춧잎과 속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잎 한 잎 넘기는 하얀 배춧잎은 책의 종이들처럼 보였고, 이를 빨갛게 칠하는 김치속은 빨간 물감처럼 보였습니다. 김치를 만드는 것이 마치 책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종이의 종류는 같았으나 크기나 모양이 달라 칠하는 방식을 늘 달리해야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같은 물감으로 칠해도 종이에 새겨지는 문양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춧가루와 김치속에 들어간 채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책 안의 쪽 하나하나는 비슷해 보였지만, 분명 달랐습니다. 이렇게 종이를 하나하나 물들여 만들어낸 책은 김치냉장고라는 서고에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오래된 책이 짙은 세월의 내음을 품고 있듯이 김치도 세월이 흐르고 푹 익은 맛있는 냄새를 품게 되겠죠. 사람이 정성을 다해 만든다는 공통점이 책이라는 사물과 김치라는 음식의 이러한 유사점을 만들고 있습니다.
김치를 책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점점 저는 지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농담을 던져보기로 했습니다.
“11월에 뱀과 벌이 없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 뭘까?”
“11월이 노뱀벌(November)이기 때문이죠.”
후, 어머니의 굳은 표정이란. 정말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어떻게든 깔깔대면서 일을 하니 40kg 정도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40kg의 배추가 남아 있었습니다. 남은 40kg의 절임배추를 가져와 물을 빼고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신나는 쪽으로 노래를 바꿨습니다. 이제는 잔잔한 페퍼톤스의 노래들이 지겹게 다가오기 시작하더군요. 첫 곡은 토이의 <reset>이라는 곡이었습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제목이 와닿더군요. 그래서 또 한마디 했습니다.
“이게 <reset>이라는 곡인데요. 배추가 reset되었네요. 하하.”
이번에는 어머니를 웃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역시 나 자신, 대단해. 신나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또 한 시간 신나게 김치속을 넣으니 일이 끝나더군요. 나 자신, 장하다. 쿡쿡 쑤시는 허리를 펴서 스트레칭을 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치 다 만들었다고 김장 끝난 거 아닙니다. 뒷정리해야죠. 1시간 동안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튀긴 붉은 물감들을 청소기와 걸레로 다 닦고 나니 김장으로 정신없던 거실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정말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김장이 끝나고 김장 김치와 함께 수육을 먹지만, 만들기도 귀찮고, 치우기도 귀찮아서 수육은 안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수고로움을 몰라 김장 때 김치와 같이 먹는 수육만 눈이 빠지라 기다렸는데 말이죠. 수육은 되었고, 그래서 치킨 시켜 먹었습니다. 김장 김치랑 같이 먹었냐고요? 아니요. 치킨무랑 먹었습니다. 김치통에서 김치 빼먹는 거만큼 귀찮은 게 없잖아요. 귀찮은 일 끝냈으니 귀찮은 일 사서 할 필요 없죠. 그래서 열심히 김장을 한 저는 아직도 우리 집 김장 김치 맛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