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장 밖에서 유물을 처음 마주하며

by baekja

첫 출근을 하고 한 2주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말을 들었습니다. 같이 일했던 연구원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관 개관을 앞둔 국립 박물관에 학예사가 3명, 연구원이 2명, 인턴이 2명이었습니다. 네, 저는 가만히 앉아 도록만 볼 수 있는 처지에 놓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대단한 일을 맡길 수도 없었기에 말 그대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그런 일에 투입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일, 바로 유물 지키기였습니다.


유물 지키기라니, 방호직 공무원도, 청원경찰도 아닌 제가 유물 지킬 일이 뭐가 있을까요? 설명을 위해서는 ‘dp'라는 말부터 알아야 합니다. 드라마로 인해 D.P.(Desrted Pursuit)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D.P.는 탈영한 군인을 잡아오는 군사경찰이죠. 박물관에서 dp는 'display'의 약자입니다. 전시실 세팅을 끝마친 후 전시실 세팅에 맞추어 유물을 놓는 마무리 작업을 보통 dp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유물은 국보인 실록과 보물인 의궤, 보물인 어보와 어진 등 가치가 무지막지하게 높은 것들인데 반해 이것을 다룰 인력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물을 만지는 작업은 보통 보험에 가입된 분들만 다룹니다. 기간제 연구원이나 인턴에게는 당연히 가입되어 있지 않았죠. 학예사 세 분 만이 다룰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한 분은 기획 전시로 바쁘셨으니 3월 말, 상설 전시 dp에서는 학예사 두 분만 있었습니다.


상설전시실은 제법 넓고 귀중한 유물은 많은데 인력은 없습니다. 업체 분들과 학예사 분들이 유물을 배치하는 동안 보조할 인원도 필요하고, dp를 기다리며 밖에 놓여 있는 유물들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겠죠. 기획전시 보조를 하는 연구원과 인턴을 제외하고, 남은 연구원과 제가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물 근처에서 이물질을 배출할 수 있으니 유물을 만지지 않더라도 마스크 착용과 라텍스 장갑 착용은 필수입니다. 코로나 때 꼈던 마스크의 살짝은 답답한 촉감과 긴장이 만든 손의 땀으로 인해 잘 들어가지 않는 라텍스 장갑의 쫀쫀함이 익숙해지기도 전, 업무를 부여 받습니다. 유물번호를 확인하고, 유물 개수 및 종류를 정확히 확인한 후 유물이 어디에 들어갈지 학예사님께 말씀드리면 학예사님이 같이 확인한 후 유물을 배치합니다. 국보와 보물을 다루는 작업인 만큼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전시실을 맴돕니다. 하지만, 긴장만 하면 실수하기에 종종 들리는 말들은 그 공기의 무게감을 조금은 가볍게 합니다.


딱 한 번, 몇 분 간 저를 제외한 모두가 전시실의 다른 공간에 가있고, 저만 유물과 함께 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진열장 밖에 나와 있는 유물들은 너무나 생경했습니다. 늘 몇 백 년의 시간차를 두고 떨어져 있던 유물이 밀폐된 곳에서 나와 저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분명 왕실의 귀중한 서책이 아닌 ‘유물’이라는 정체성으로서는 저와 늘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지만, 과거에 유리된 것 같았습니다. 공조기의 소리만 들리고 제 숨소리마저 멎은 그 고요한 검은 공간에서 저는 과거에서 현실로 나온 유물을 처음 맞이하며 몇 분이고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몇 분은 제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긴장, 설렘, 황홀이 섞인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저는 그 흥분을 간신히 삭히며 조금 더 역사와 가까워진 이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잠시 접어두었던 인문학의 꿈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저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6개월 단 한 기회도 놓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분, 다짐이 뒤엉킨 속에서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유물 배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다행히 상설 전시는 보수공사 정도만 하여 이전에 했던 것처럼 유물 배치를 하면 되었습니다. 유물 캡션과 설명에 맞게 실록과 의궤의 쪽수를 찾아 펼치는 작업이 끝나고, 커다란 어진들이 그 무엇보다 조심히, 그리고 세심하게 벽에 걸리고 나자 제가 마주한 첫 dp는 끝났습니다.


배치가 끝나고 세 시간, 저는 제 사무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다가와 저와 오롯이 함께 했던 그 순간을 만끽하면서요.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