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시민이 평창군민이 되기까지, 7일

by baekja

그렇게 저는 붙었습니다. 다만, 지역이 지역인 데다 이미 한 사람이 합격을 거절한지라 전화를 건 선생님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안 오실 거면 빨리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지역이고 뭐고 일단 박물관에서 일할 수 있다는 데 가야지. 이걸 안 가? 숱하게 박물관을 다니며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던 하나의 꿈. 박물관에서 일하기. 그걸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횐데 안 가는 게 바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몇 번 다른 데는 떨어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전 현실을 볼 줄 아는 차가운 사람(딱히 그렇진 않지만)이기에 물어봐야 했습니다.


“월세는 어떻게 구하나요?”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몇 분 후 한 공인중개사 번호를 주셨습니다.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6개월 월세를 구하는데 방이 딱 하나가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보증금 500에 월세 45 정도. 방은 15평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에서 봤던 몇몇 매물들과 가격이 비슷하기에 마음이 급해서(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로 가계약을 했습니다. 저지르고 나니 드는 생각, 어라? 가서 매물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날짜를 확인하니 3월 19일 수요일, 당장 평창에 입주하는 게 3월 25일 화요일. 망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거니 금요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공인중개사에 전화를 걸어 금요일에 매물을 보자고 했습니다. 흔쾌히 괜찮다 하셨고 그렇게 금요일 평창행이 결정되었습니다.


붙은 게 기분은 좋았지만, 문제는 살인적인 일정이었습니다. 원래는 3월 20일 OT, 3월 21일 금요일 입사. 후후후. 제대로 합격해도 3월 18일 합격에 3월 20일 OT, 3월 21일 입사는 누가 만든 일정일까요? 다행히 입사는 미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OT는 가야 해서 당장 합격한 다음 날 OT를 가게 되었습니다.


국가유산청 청년인턴을 전부 모아 하는 OT인지라 정말 다행히도 OT는 서울에서 했습니다. 경복궁 근처 국립고궁박물관 옆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에서 했습니다. 들어갈 때는 컨테이너가 즐비해서 사기를 당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제 이름이 있는 명찰도 있고, 넓은 강당도 있어 ‘아, 사기는 아니구나!’하며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OT 교육은 늘 그렇듯 그리 재밌지는 않았고, 다만 신기한 점은 국가유산청이 문체부 산하이긴 하나 무척 독립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OT 내내 ‘국가유산청’이라는 단어를 듣다 보니 국가유산청의 이전 단어인 문화재청이 이제 입에서 좀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OT의 마지막은 국가유산해설사께서 해주시는 경복궁 수업이었습니다. 작년에 경복궁 수업을 만들면서 공부를 많이 하기도 했고, 이미 이전부터 공부를 많이 했던 경복궁의 설명은 대체로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한 가지가 새로운 사실이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 난간에 12지신으로 추정되던 동물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와세다대학에서 찾아낸 『경복궁영건일기』에 28수, 그러니까 별자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이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늘 마음 한편에 담아둔 의문이 풀리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평창으로 향했습니다. 평창에서 공인중개사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방을 살펴보았습니다. 전 세입자가 청소를 제대로 해놓지 않아 더러웠지만, 거실에 방이 딸려 있고, 부엌이 있는 데다 꽤 넓은 베란다까지 갖춘 15평의 위대함에 놀라며 앞으로 보낼 6개월을 기대감으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입주하기 전날 어머니와 함께 필요한 물품들을 사며 평창 생활에 대한 설렘을 마음 깊이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25일 화요일, 입주 첫날! 어머니와 함께 평창으로 갔습니다. 월세 계약을 제 눈으로 하나하나 보고, 제 손으로 하나하나 사인한 후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근데 이상하지 않나요? 하하, 제 인생 첫 월세 계약이 이렇게 쉬우면 안 되는데?


네, 전 세입자가 여전히 청소를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전 세입자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싶었습니다. 각종 교통 위반 벌금 통지서부터 가스비, 관리비 고지서까지 치울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옷부터 쓰레기까지 곳곳에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어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저, 어머니, 공인중개사 선생님까지 전부 화나서 서로 불만을 성토하다가 밤에 청소를 마무리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일단은 해산했습니다.


계약도 했고, 일단 집에 대한 권리는 얻었으니 들어가진 못해도 전입신고는 할 수 있습니다. 월세 보증금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꼭 전입신고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민등록증이 나온 후 처음으로 새로운 주소지를 주민등록증 뒤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제 인생 최초 농어촌 주민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전입신고 절차는 서류만 잘 갖춰오면 금방 끝나더라고요. 인구 감소 농어촌이기에 전입 선물이 있었습니다. 종량제 쓰레기봉투 20L 20장, 평창군 유일의 영화관 HAPPY700평창시네마의 할인권, 그리고 평창사랑상품권 5만원 권이었습니다. 평창사랑상품권은 이후에 이장님이 실거주하는지 확인한 후 등기로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이장님’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그리 생소하던지. 참 도시에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입신고를 끝내고 인터넷 설치 신청, 점심식사, 필요한 것 구매(꽤 커다란 다이소와 하나로마트가 있습니다.)를 하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습니다. 들어간 방은 청소가 된 듯했지만, 여전히 내부는 제법 더러웠습니다. 잘 데가 없으니 일단 들어가 자고, 다 하지 못한 청소는 청소비를 받은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집 청소 마무리를 채 하지 못한 새내기 평창군민은 내일 출근을 생각할 새도 없이 깊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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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