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학교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의 부지런하고 잠이 적은 나와는 달리 어렸을 적의 나는 생각보다 잠이 많아 뛰면 교실까지 3분 걸릴까말까 한 그 거리를 항상 뛰어다녔다. 학원은 물론 더 뛰어다니는 걸 선호했다. 무언가를 하다보면 늘 일찍 도착하는 법 없이 뛰어서 제 시간에 맞춰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공부벌레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오래 달리기 하나 만큼은 반에서 상위권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는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반복되었고 대학교 때 상모를 돌리다 무릎을 다쳐 체력을 다 까먹기 전까지는 늘 체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군대에 갈 시간이 되었고 대학교 입학할 때 50대 중반이던 내 몸무게는 어느새 70이 되어있었다. 당연히 군대 가기 전이라고 열심히 빈둥대던 나는 체력이 떨어져있었고 훈련소 처음에는 꽤나 고생을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아침뜀걸음과 동기부여로 금세 체력이 올라왔으며 어렵지 않게 체력검정에서 상위권에서 들 수 있었다. 부대에 와서는 살을 빼겠다는 이유로 런닝 머신 위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다가 체력이 더 좋아져 대대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웠다. 남는 게 체력 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물론 나라고 오래 뛰는 게 힘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참다보면 결승선은 눈앞에 있고 그 결승선을 통과하는 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실 그런 면에서 생각보다 숨을 빨리 헐떡이는 나는 체력이 좋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뛰어야한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생각하고 집중하는데 능력이 좋은 것이 아닐까.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결승선을 봐야 된다는 일념 하나만이 강렬한 게 아닐까. 물론 생각만 한다고 오래 뛸 순 없겠지. 생각이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거나 뛰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시험이 있다. 수능조차도 절대 시간은 그 시험보다 많을지언정 그렇게 열성을 다하지는 않았다. 그 준학예사 자격시험에 운 좋게 합격한 사실을 알게 된 날, 야자는 내팽개치고 교실 앞 언덕길을 미친 듯이 뛰었던 것 같다. 뛰는 와중에 눈은 내려 더 행복감을 더해주었다. 기분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뛰어다니는 상황은 이 때 만이 아니었다. 술 먹고 기분 좋게 혼자 있을 때도, 시험이 끝나 해방감에 젖은 날에도, 그냥 일이 잘 풀리는 날에도, 하루 일과를 힘들게 끝내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도 나는 뛰었다.
행복함이 가득할 때만 뛰었던 것도 아니다. 기분이 꿀꿀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뛰었다. 특히, 비 오는 날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무조건 뛰러 나갔다. 비로 샤워를 하는 그 시원한 감촉이 기분을 잠시나마 좋게 해주었다. 특히 잔뜩 젖은 상태로 집에서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 말리고 나면 그 상쾌함이 정말 대단했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을 때도, 교복을 입고 있을 때도, 와이셔츠를 입고 나갔을 때도, 후드를 입고 나갔을 때도, 모자를 쓰고 있을 때도 기분이 안 좋으면 일단 뛰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은 가방에 쑤셔 넣고 막 뛰어다녀서 가방 안의 교과서가 다 젖어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달리기를 택한 것부터 나는 이미 달리기를 좋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달리지는 않을 테니까. 이렇게 수많은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내리막길의 달리기다. 언덕 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면 내가 평소에는 낼 수 없는 그 속도감이 너무나 좋다. 내 뒤로 하나둘씩 지나치는 풍경들,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공기의 촉감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느낌이다. 마치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뛰기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냥 뛰면서 느껴지는 외부의 다양한 감각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꽤 오랜 시간 뛰다보면 나는 내 몸과 대화를 하고 있다. 오늘의 무릎상태는 괜찮은지. 밥을 먹은 지 별로 안 되어 빨리 숨이 차지는 않는지. 잠을 별로 못자 피로가 빨리 오지는 않는지. 간만에 뛰어서 다리 근육이 받쳐주지 않는지. 그렇게 홀로 달리다보면 내 몸의 상태에 하나 둘씩 집중하게 되고 시야에서 보이는 주변 풍경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러다보면 변하지 않는 세상, 어쩌면 알 수 없는 이 외부 환경에서도 내 자신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여러 요소로 구성된 이 몸이 하나의 유기체로 활동하고 있음에 안심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과학에서, 누군가는 철학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격렬하지만 사색적인 운동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달리기를 할 때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의 고통은 결과의 행복으로 확실하게 돌아오며, 내 감정을 표출하는 가장 큰 수단이고, 내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장점들이 가득한 달리기를 나는 놓을 수 없다. 물론 하루는 피곤해서, 하루는 귀찮아서 안 뛸 수도 있다. 하지만 멋진 달릴 공간이 있다면 나는 달리기를 계속할 것이다. 너무 힘들면 쉬었다 다시 뜀을 반복하면서. 너무 힘들다면 그건 즐거운 취미가 아니니까. 나에게 고통을 주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한 인문학의 넓고 넓은 세계로 충분하다. 그 세계에서 내 존재를 찾을 수 없고 만족을 찾을 수 없을 때 돌아올 한 장소는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나에겐 달리기가 그런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