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풍경

by baekja

15개월 만에 작전 지역으로 올라와 초병 근무를 서게 되었다. 군견병이 좋냐, 초병이 좋냐를 묻는다면 글쎄……. 군견병이 익숙해서 편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역 직전 초병이 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보고 싶어서. 백령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다와 북한을 바라보면 잠시 내가 군인인 것도 잊고 그저 눈앞의 풍경에 매혹되는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서였다.


눈으로 가득 메워진 섬을 기대했다. 하지만 올해의 겨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곧은 해안선과 벌거벗은 섬의 능선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해안선은 자연을 거부한 채 국방색 방벽을 쌓은 인간들로 인해 직선화되어버렸다. 곡선은 자연의 선이고 직선은 인간의 선이라 했던가. 인간의 이익 다툼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폐를 끼친듯해 절로 눈이 돌려졌다. 스윽 돌아보니 소나무 같은 침엽수림은 없고 둥그스름하게 굽은 채로 완만하게 이어진 능선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은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나의 마음에 와 닿았다. 능선에 보이는 나무들은 모두 단풍 옷을 잃고 벌거벗었다. 하지만, 쓸쓸함보다는 다수의 나무들이 주는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이 안정감은 부드러운 곡선과 어우러져 높지는 않지만 깊고 깊어 그 속을 알 수 없는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면 귀에 바람이 스치는 윙윙 소리 너머에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린다. 처-얼썩. 처-얼썩. 쏴아아. 기세 높은 파도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 보이는 그 파도는 고요한 규칙성으로 내 귀를 간질였다. 새벽의 절에 조용히, 하지만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와 같이 섬을 울리며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해가 지기 직전 하늘을 뒤덮은 엷은 파랑과 옅은 분홍빛은 그 기묘함을 한층 더했다. 솜이불처럼 하늘을 살짝 하지만 포근하게 덮은 구름은 낙조의 강렬함을 저녁의 은은함으로 승화시켰다.


해가 거의 다 져 온 세상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때 시선을 북쪽 바다로 돌리면 그 너머에 북한이 보인다. 바다 너머 북쪽의 해안선엔 직선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구불구불한 해안선 위로 언덕의 실루엣이 매우 불규칙하게 붙어 있어 그 형태를 종잡을 수가 없다. 날이 밝으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북한의 민가나 서슬퍼런 북한의 대포가 보일 법도 하다. 그러나 해가 져가며 뿜어내는 남은 빛을 흩뿌리는 오늘 같은 흐린 날은 그런 자그마한 것들은 볼 수 없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땅덩어리가 바다와 뒤엉켜 맞닿아 있는 모습뿐이다. 그 덩어리는 마치 거대한 추상 설치 미술 같아 보인다. 그것은 마음속에 잔잔하지만 웅장한 울림을 주어 인간의 예술이 자연을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병풍의 수묵화에 그려진 먹 덩어리들을 넋이 빠진 듯 바라보다 다시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바다가 바위와 만나 흰 거품을 만들며 부서지는 조그마한 담채화가 내 시선을 그곳에 머물게 한다. 파도의 공격에도 몇 백만 년을 가만히 서있었을 바위의 굳건함이 나에게까지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그 굳건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규칙적인 무늬가 짙게 새겨져있다. 파도와의 싸움 후 남은 상처일 것이다. 오랜 삶 동안 굳건히 버텨왔으나 어쩔 수 없이 새겨진 상처들이 노인의 주름살을 떠올리게 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세월의 풍파는 저 거대한 바위들도 어쩔 수 없음에 괜스레 숙연해진다.


별이 쏟아지는 밤을 기대했다. 하지만, 하늘을 가린 구름은 별이 쏟아지는 것을 막고 대신 눈을 내렸다. 눈이 사뿐히 내려앉지 않고 어깨에 타닥타닥 튀기는 품이 싸락눈이다. 어두워 보이지는 않지만 선명한 촉감이 눈이 내리는 것을 대신 본다. 내리는 광경을 보려 손전등을 켠다. 쭉 뻗어나가는 빛의 선 안에서 수많은 눈 결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사되는 빛 덕분에 눈 결정은 별로 변하여 나풀나풀 거리며 수없이 많이 떨어진다. 측면에서 바라보자 눈이 떨어지는 땅은 해안선이 되고 내리는 눈은 파도가 된다. 그런 격렬한 움직임이 눈에 잡히지만 정작 들리는 소리는 내 어깨에 눈이 부딪히며 속삭이는 소리뿐이다. 그런 역설적이지만 묘한 상황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름다운 침묵의 폭풍이 그치고 어둠만이 남으면 잠시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요함에 취한다. 나를 매혹했던 그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 묻힌 채로 그저 다시 상상한다. 그리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들을 하나씩 채워 넣으며 기억한다. 다시 못 볼 아름다움이기에 더욱 소중해진 이 풍경을 마지막 하나하나 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은은하게 들리는 파도소리를 풍경의 마지막에 넣고 나를 2년 동안 즐겁게 해주었던 그 정경을 마음 깊이 넣어둔다. 이 장면을 평생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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