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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시작도 전에 망했어요.

힘들게 구한 땅, 집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by 소가 SOGA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경매 낙찰 이후의 과정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모든 것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비용마련도 오직 이 날만을 위해 부채 없이 신용등급 관리에 공을 들여온 터라 1 금융권 은행에서 무리 없이 경락잔금 대출을 최대한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심적으로 가장 부담되었던 그 집에 거주하고 있는 세입자를 내보내는 명도 진행도 직접 찾아가 대화를 통해 잘 마무리할 수 있었고요. 마침 그 가족도 본인들의 전세보증금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어 안도하는 마음이 커서인지 이사비용과 같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아 득의양양 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루빨리 좋은 건축가를 만나 무수히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멋진 아이디어들을 도면 위에 쏟아 보고 싶었죠.


오래된집 골목.jpg 예전 집의 뒷골목


하루는 근처를 서성이며 아내와 어떤 집을 지을지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마침 옆집에서 한 분이 나오시더군요. 앞으로 이웃이 될 분이니 좋은 관계를 맺고픈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번에 옆집을 경매로 낙찰받았어요. 앞으로 이사 와서 살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 자네구만. 경매로 주인 바뀐 건 들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비싸게 샀어? 어차피 집도 못 짓는데..."

"네?... 집을 못 짓는 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집은 길이 없는 맹지라 집 못 지어."

"그럴 리가요? 제가 그 부분은 확인을 했는데요."

"아무튼 못 지어."


하늘이 열 번은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적인 말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건축을 할 수 없다니요?

도로와 접하지 않은 토지인 맹지에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맹지의 경우 경매 매각물건명세서나 감정평가현황에 명시가 되어 있는데 수십 번을 읽어 본 자료 어디에도 본 기억이 없었거든요. 아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이 어설픈 정보를 잘못 알려주셨을 거라 판단했지만 혹시나 불안한 마음에 구청 건축과를 직접 찾아 문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담당주무관도 건축할 수 있는 대지가 아니라고 하네요.


엄밀하게 말하면 맹지는 아니나 진입로가 건축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 순간의 정신적 공황은 생생히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망연자실한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주무관에게 다시 물어보는데 목소리가 벌벌 떨리더군요.


"집을 지을 방법은 도저히 없나요?"

"네 현재로서는 허가가 나지 않아요. 인근 대지를 추가로 매입하던지 해서 해결하셔야 해요"


담당 주무관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애원하고 싶었습니다. 작은 집 하나 짓겠다는 희망하나로 대출까지 받아 제가 가진 전부 아니 그 이상을 걸고 겨우 땅을 마련했는데 집을 지을 수 없다니요. 50년도 넘은 그 낡은 집에 저를 비롯한 온 가족의 미래까지 갇혀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제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거죠?

이후 한동안 감당하기 힘든 좌절감에 무너진 마음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끊임없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오랫동안 꿈꿔 온 집하나 가져보겠다는 작은 희망으로 노력했을 뿐인데 시작부터 이리도 큰 시련의 벽에 막혀버렸으니까요.


돌이킬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먼저 이웃땅 소유주를 찾아가 건축을 위한 최소한의 진입로 부지만이라도 저에게 분할에 매수해 달라 간곡히 부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차갑게 거절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원래 그분은 제 땅의 이전 주인과 토지를 합쳐 빌라를 지을 계획이었는데 제가 갑자기 나타나 땅주인이 되었으니 그분 입장에서는 제가 오히려 얄미운 훼방꾼이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당시엔 아내와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남들처럼 차근차근 빌라부터 장만해 차츰 집을 넓혀가는 게 맞지 않냐고 누누이 저에게 말했거든요. 하지만 우리만의 집에 대한 간절함을 접을 수 없던 저는 그때마다 확고한 신념으로 설득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호기롭게 여기까지 밀어붙인 것이고요. 그런데 집 짓기는 고사하고 세 들어 살고 있는 집보다 초라하고 낡은 집에서 기약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니 아내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요? 어느 날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나며 현기증이나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 내시경 촬영을 하니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인한 빈혈로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며칠간의 입원까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병원 입원실에서


어쩔 수 없더군요. 마음 아프지만 생각보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집을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받아들였습니다. 낙찰 후 신속히 설계와 공사를 진행하려던 본래의 계획은 일단 무기한 덮어두고 현실적으로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적지 않은 대출이자가 매월 가계지출에서 추가로 발생하게 된 것이었어요. 집과 사무실 임대료에 대출이자까지 기약 없이 다달이 내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월세로 있던 사무실을 나와 낙찰받은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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