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풀었습니다. 이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어요.
망할 때까지는 망한건 아니죠.
당시로는 고정 지출을 줄이기 위한 마지못한 선택이었지만 낡은 가정집을 사무실로 이용하던 시절은 나름 재미가 있었습니다. 방이 두 개였는데 사무실 공간은 한 칸만 필요하니 방 하나가 남았어요. 부엌도 있었고요. 살고 있는 집에서도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여서 집 근처에 별장이 생긴 셈이었죠. 그래서 여유 있는 평일이나 주말에 우리 가족은 음식도 해 먹고 잠도 자곤 했습니다. 마치 글램핑이나 콘도를 빌려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으로요. 하지만 이런 소꿉장난 같은 재미만으로 언제까지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건축 허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해보자. 그래도 도저히 안되면 이 낡은 집을 제대로 리모델링이라도 해서 살기로 하자.'
답 같은 건 원래 없을지도 모를 큰 숙제를 풀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동네 주민들은 한결같이 맹지여서 건축을 못한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적도 상의 진입로로 실제는 차량이 진입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일정 크기 이상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건물 면적에 따른 주차장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주차장을 만들어도 지적도에 표시된 도로로 차가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 허가를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요.(조금 더 복잡한 내용 입니다만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데다 이 토지만의 특수한 경우이므로 이 정도 설명으로 갈음합니다.) 따라서 지을 수는 있지만 주차장 설치의 의무가 없는 매우 작은 크기의 건축물만 허가가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오히려 기존 구옥보다 작아지게 돼 집을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먼저 건축요건에 부합하는 진입로 확보를 위해 우리 땅의 대지와 맞닿아 있는 시청과 구청 소유 땅 매입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땅의 처분을 관할하는 부서에 수차례 질의를 하고 장문의 민원을 여러 번 제출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매번 혼신을 다해 장문의 글들을 써 보냈어요. 읍소도 하고 강경한 자세로 요청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수일을 공들여 작성한 민원 대부분은 너무도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몇 줄의 답변으로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듣는 없는 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혼자 목청 높여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부르는 상황 같더군요.
이와 더불어 틈틈이 건축설계 사무실들을 방문해 혹시 모를 해결 방법이 있는지 문의를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비전문가인 제가 혼자 전전긍긍하며 방법을 찾는 것보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건축가님들에게 방법을 찾아주시면 저희 집 설계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실력과 열정 가득한 건축가 분들도 만날 수 있었고 흥미롭고 유용한 건축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던 건 큰 수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곳은 없더군요.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어느덧 무려 2년의 시간의 흐르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좌절로 의욕이 많이 꺾이게 되더군요. 이제는 미련을 내려놓고 단념을 해야겠다는 마음만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집을 짓고 싶은 제 마음이 너무도 절실하다는 이유만으로 건축허가를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에 집을 짓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저뿐일 테니까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니 보이는 것들
집 짓기는 반쯤 체념하고 하루하루를 살던 어느 날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주차장인데... 너무 건축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본 건 아닐까?'
그래서 부랴부랴 주차장과 관련된 법령을 찾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읽기에도 불편하고 딱딱한 법 조문사이에서 한 줄기 희망의 반짝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주변 토지이용 상황으로 인해 주차장 설치가 곤란하다고 인정받으면 주차장 설치 대신 비용으로 납부로 대신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등뒤로 찌릿한 전율이 흐르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습니다. 희미하게 꺼져가던 의지의 불씨가 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관공소를 여러 번 접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담당자가 일개 민원인이 발견한 내용을 적극 반영하여 전향적으로 접근하는 수고를 해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따라서 먼저 전문가인 건축가를 만나 확실한 검토를 받고 함께 민원을 진행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전부터 만약 집을 짓는 다면 어떤 건축사무실에 의뢰하는 것이 좋을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해오고 있었습니다. 그중 포트폴리오가 제 취향과 결이 맞고 함께한 건축주들의 평가가 좋아 마음에 두고 있던 U건축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저희 집에서도 꽤 가까운 거리였어요.
U설계사무실의 대표 건축가님을 만나 그간의 사정과 제가 새롭게 찾은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다행히 건축가님이 저희 집 위치에 큰 흥미를 보이시더군요. 바로 다음날 직원과 함께 현장을 방문해 검토해 주셨습니다. 구청에도 직접 내용을 전달해 문의해 주셨고요.
그리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건축이 가능합니다."
"정... 정말로요?... 진짜죠?"
지난 2년 얼마나 애타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요. 간절한 마음은 반드시 그 길을 찾는 것인가 봅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떠올리니 눈물이 날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오랫동안 제 삶에 드리웠던 어두움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참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는 하지만 비전문가인 제가 스스로 해답을 찾을 때까지 담당 공무원과 방문했던 건축사무실 중 누구도 해결책을 먼저 제시하지는 못했으니까요. 정작 문제의 답은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별것 아니었는데 말이죠. 우리는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정작 나에게 딱 필요한 도움을 받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순적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어떤가요? 제 두 발을 꽁꽁 묶고 있던 매듭을 이제라도 풀고 마침내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훨씬 컸습니다. 그리고 전화위복이랄까요. 주차장 면제로 인해 1층 전부를 실내공간으로 설계할 수 있어 공간 효용의 이점은 더욱 크게 가져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결과적으로 모두가 건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경매에서 낮은 가격에 낙찰받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무인도에 난파된 것 같았던 우리 가족의 집 짓기는 순풍 아니 신풍의 도움을 받아 다음 목적지로 힘차게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