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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Jun 03. 2021

여행의 시작

신혼여행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야겠다



  수능을 일 년 앞둔 고3의 교실엔 조용한 흥분이 흘렀다. 새로운 교실에 모여 반 가운 얼굴을 찾는 친구들, 고3의 첫날을 경건하게 맞이하듯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몇몇과 이 반 저 반 뛰어다니며 누가 몇 반인지 파악하는 오지라퍼, 작년 고3 선배들이 사물함에 남겨두고 간 뜻밖의 선물을 보며 기뻐하는 친구들이 뒤섞였다. 그 사이에서 나는 동아리 선배 언니가 선물로 남겨 놓은 빈츠를 한 입 먹으며 왠지 모를 흥분감이 차올랐다. 이제 1년만 지나면 해방이다!


  명색이 고3인데, 평생의 큰 숙제인 대학 입시를 앞두고 빈츠나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니.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나도 참 나다, 싶다. 학창 시절의 마지막 1년이라며 공부보단 사진을 더 많이 찍고, 추운 날엔 레몬청을 담가 친구들에게 레몬티를 나눠주고, 모의고사 치는 날은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는 날이었고, 야자시간엔 라디오를 더 열심히 듣고, 학원은 가는 게 아니라 믿으며, 기면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곯아떨어지던... 공부보다는 학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공부를 하나도 안 한 것 같지만, 좋아했던 과목도 몇 개 있었다. 문학과 경제와 세계 지리와 일본어만큼은 좋아했고 열심히 했다. 스무 살이 넘으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율을 알려면 경제를, 세계 곳곳을 여행하려면 세계 지리를, 이야기하려면 영어를... 좋아해야 했지만 입시 위주의 주입식 영어는 싫다며 외면해버렸다. (왜 그랬니 그때의 나야....) 대신 스스로 선택한 것이 일본어였다. 제2외국어 시험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내신에 반영되는 과목도 아니었는데도 시험 기간에 일본어를 공부했다면 말 다 했지. 그때 배운 일본어로 10년 동안 일본 여행을 잘 다녀왔으니, 수능 등급과 내신보다도 내 인생에 더 많은 도움이 된 셈이다.


  이 4가지 과목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세계 지리’ 과목이었다. 책의 맨 첫 장을 펼치면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는 교과서를 나는 사랑했다. 비록 학교 책상에 앉아 있을지라도, 그 책을 펼치고 세계 어디든 여행했다. 지구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호수 티티카카로도 떠났고, 바람이 불면 노래하는 사막 타클라마칸으로도 떠났다. 빙하가 만든 아름다운 협곡 피오르드를 굽이굽이 느끼고,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드리워진 극지방의 오로라를 보기도 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사바나, 동물들의 천국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있다가, 툰드라 위의 눈밭을 뛰노는 북극곰을 만나기도 했다. 화산활동과 세월이 만들어 낸 버섯마을, 카파도키아 위를 떠다니는 열기구를 탔다가, 세계 8대 불가사의 피라미드로 날아갔다. 황홀했다. 땅따먹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곳을 알게 될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다. 언젠간 이곳에 다 가봐야지, 언젠간 세계여행을 해야지,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이곳에 왔다. 선생님의 첫마디부터 나를 설레게 했던 곳.


  -여러분이 있는 이 교실 바닥 밑을 뚫고 지구 반대편으로 나가면 어딜까요?


  내가 앉아 있는 이 교실 바닥을 뚫고...? 지각을 뚫고 맨틀과 핵을 지나 지구 반대편으로 나가면...? 왜 그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지? 지구 반대편이 어딘지 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궁금함과 흥분이 그렁그렁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맑은 공기’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낯선 어감으로 이뤄진 단어의 발음이 참 좋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걸 대척점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정확한 대척점은 여기 이쯤, 바다입니다.


  선생님은 칠판 위에 순식간에 남미 지도를 쓰윽, 그린 다음 점을 콕 찍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앞바다 어딘가에 찍힌 대척점이었다. 땅이 아니라 바다라서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들었지만, 마음속엔 이미 낯선 단어가 새겨진 뒤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언젠가 꼭 지구 반대편으로 가봐야지. 아주 근사한 여행이 되리라 믿었다. 이곳엔 누구와 함께 갈까, 벌써 계획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이라는 말만으로도 로맨틱한 곳이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가야겠다! 남자 친구랑 갔다가 혹여 헤어지고 나면 지구 반대편이 슬퍼질지도 모르니, 결혼할 사람과 가야겠다! 신혼여행으로!



  이날 이후, 20대를 지나는 내내 소중히 품고 있었다. 인생의 비스킷 통 안에서 달고 맛있는 쿠키만을 골라 꺼내 먹어도, 늘 한구석에 가장 달고 맛있는 쿠키는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 쿠키를 누구와 어떻게 맛있게 먹게 될까, 기대와 흥분 이 달그락거렸다. ‘설마 못 먹고 썩게 되는 건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20대 마지막 생일을 맞이하던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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