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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Jun 10. 2021

MIND THE GAP

해맑이처음으로 짜증을 냈다



               

  자동문이 열린다. 캐리어 바퀴가 미끄러지듯 가볍게 따라온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히드로 공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응...? 맞다. 한눈에 들어온다. 끝에서 끝이 까마득한 인천공항과는 달리, 히드로 공항은 아담했다. 한눈에 쭈욱 훑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바로 가는 직항은 없다. 무조건 한 번 이상 경유를 해야만 한다. 우리가 알아봤을 때 가장 싼 루트는 미국 댈러스를 경유하는 방법이었고, 가장 비싼 루트는 스페인 마드리드를 경유하는 루트였다. 마드리드는 너무 비싸니까 제외하고, 댈러스가 제일 싸긴 하지만... 왠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미국을 간다면 제대로 가고 싶은데... 그래서 제외. 이제 남은 건 영국 런던을 경유하거나, 이탈리아 로마를 경유하거나... 은근 루트는 많다. 그중에서 우리는 영국항공을 타고 런던을 경유하기로 했다. 둘 다 런던은 가 본 적이 없었고,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가나 싶은 마음과 그나마 저렴한 가격이 아주 괜찮았다. 그리하여 12시간의 긴 비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입국장을 나오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잠깐의 현기증. 시차 적응 같은, 약간의 공간 적응(?)이랄까. 아직은 어디가 어딘지 몰라, 머릿속이 새까만 데서 오는 방향감각 현기증 같은 것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 내비게이션이 동서남북을 찾아 뱅글뱅글 돌듯이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자, 일단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을 해 보자. 바로 앞엔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오른쪽엔 유심칩을 파는 가게가 있다. 좋아. 머릿속의 내비게이션도 방향을 찾았다. 일단 유심칩을 사고, 교통카드를 사자.  

    

  -저기 유심칩 파는 데 있네!     


  해맑이 손으로 가게를 가리킨다.      


  -어, 근데 오빠 잠깐만. 블로그에 보니까 자동판매기에서 사면 더 싸게 살 수 있다던데. 자동판매기가 어딨지?     


  분명히 블로그에는 이쯤에 자동판매기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 있어야 할 위치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를 옮긴 걸까? 어느새 공항을 한 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히 있다고 했는데... 다시 공항을 반 바퀴쯤 돌아봤는데도 자동판매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떡하지. 사실 14시간을 비행한 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게 비행기에서 잔 건 잔 것 같지가 않다. 일어난 지 18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시간을 들여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냥 저기 숍에서 살까?      


  우리가 헤매는 동안 유심칩을 사려고 기다리던 줄이 다 끝났다. 직원은 친절하게 유심칩도 갈아 끼워주고, 핸드폰 설정도 바꿔주고, 바뀐 전화번호도 확인해주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우리는 각자 서로의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 둔다. 런던 해맑, 런던 쏭이라는 이름으로. 




  자, 이렇게 유심칩 사기도 끝났고! 이번엔 교통카드를 사야 한다. 교통카드 사는 곳은 어디 있지? 교통카드 판매기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슬쩍 둘러봤는데 없어 보인다. 이제 핸드폰이 되니까 검색을 해 보자, 하고 핸드폰을 꺼냈는데,      


  -내려가면 있겠지.     

  

  공항을 둘러보던 해맑이 말했다.      

  

  -내려가서 없으면?     


  대답이 없다. 검색은 왜 이렇게 또 느린 거야. 마음이 급해진다. 해맑도 같이 좀 찾아봐줬으면 좋겠는데, 내려가면 있지 않을까, 하는 말 뿐이었다.     


  -확실해? 알아보고 얘기하는 거야?     


  그냥 무작정 내려갔다 없으면 다시 또 올라와야 하는데, 두 번 걸음 하기 전에 검색해 보면 되는데, 왜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는 걸까. 아이참, 핸드폰이 느려 검색이 자꾸만 되지 않는다. 혼자 마음이 급해진 나는, 해맑의 말대로 일단 내려가 보자고 했다. 


  에스컬레이터엔 캐리어 금지 표시가 붙어 있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몇 층에 있는지 안내판 없이, 도착하면 알려주는 전등만 붙어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사진도 몇 장 찍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엘리베이터는 오지를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몇몇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쳐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우리도 그냥 에스컬레이터로 갈까?     


  백팩을 멘 해맑이 물었다. 내가 든 캐리어가 문제였다.      


  -저긴 캐리어 금지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갖고 타잖아. 


  -곧 올 것 같은데...


  -계속 안 오는데. 고장 난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전등에 불이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부피가 큰 캐리어는 아슬아슬하게 한 칸에 걸쳐졌다. 캐리어를 잡고 고개를 드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게 보였다.     


  -거 봐! 엘리베이터 왔잖아.      


  지하철을 타는 플랫폼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도 교통카드를 파는 곳은 안 보였다.      


  -이거 봐, 여기 없잖아. 위층에 있을 거라니까.


  -그럼 어떡해. 다시 올라가?     


  벌써부터 배낭이 무거운 듯 해맑이 말했다. 내려오자고 한 게 누군데, 그럼 다시 올라가서 사야지 별 수 있나, 그럼 어떡하자고 나한테 저렇게 묻는 거지? 마음이 뒤엉켰다.      


  -여기 없는데 어떡해?     


  순간 불꽃이 튀었다. 플랫폼에 사람은 없고 우리 둘 뿐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검색도 안 되고 어떡해!!! 그때, 개찰구 옆에 역무원이 보였다.      


  -물어보고 올게.      


  다행히 역무원에게서 교통카드를 살 수 있었다. 급히 해맑을 불렀다.     


  -여기서 살 수 있네.      


  하... 말문이 막혔다. 이미 마음이 엉켜서 ‘그러네~’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교통카드를 태그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뒤따라오던 해맑의 교통카드에선 다른 태그 소리가 났다.     


  ‘띠디디딕’     


  다시 한번 해맑이 태그 했는데도 같은 소리가 났다. 해맑은 갸우뚱하더니 그냥 걸어 들어왔다.      


  -그냥 오면 어떡해? 안 찍힌 거 아니야?      


  -나는 찍었는데.     


  -아니, 다른 소리가 났잖아. 잘 안 찍힌 것 같은데.     


  -난 분명히 찍었어.     


  이대로 그냥 갔다가 나중에 내려야 할 때 못 내리면 어떡하나, 뭐가 잘 못 됐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냥 지나치기가 찝찝했다.      


  -역무원한테 가서 물어봐.      


  해맑은 쭈뼛거렸다. 성질이 급한 내가 또 역무원에게 달려가서 안 되는 영어로 안 찍힌 것 같다고 말했다. 역무원이 카드를 무언가에 다시 체크해보더니 돌려주며 가서 다시 찍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해맑이 다시 찍어보니 그제야 ‘띠딕’하고 울리는 태그 소리.     


  -이제 찍혔네.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약간 굳은 듯했다. 왜 이렇게 삐걱거리지... 이제 막 런던에 도착했는데, 이제 신혼여행 시작인데... 얼른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자. 숙소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야. 피곤함과 예민함으로 마음이 엉켜버렸지만, 런던에 도착했는데 이럴 순 없다! 나에게도 첫 런던이었고, 해맑에게도 첫 런던이니까! 기분을 바꿔서, 지하철을 타자!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다행히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하철이 너무 작다! 캐리어를 발 앞에 두면 통로를 다 막아버리는 정도로 작았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넘게 가야 하는데 어쩌나. 캐리어를 의자 손잡이 옆에 바짝 붙여두긴 했는데 워낙 지하철이 작아서 신경이 쓰였다. 해맑의 백팩도 캐리어 옆에 딱 붙여두었다. 최소한 통로는 막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타고 내릴 때 잘 봐야겠다 싶어 다시 한번 보는데, 백팩의 허리끈이 풀려 있는 게 보였다.     


  -오빠, 저 허리끈 가방 앞으로 묶어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저 정도는.      


  -아니 그래도 사람들이 타고 내리면서 밟을 것 같은데...      


  -괜찮아, 냅 둬.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잖아. 앞으로 묶어 놔.      


  -안 넘어져~~     


  -저걸 저렇게 둔다고?     


  -아 그냥 좀 냅 둬~!     


  처음으로, 해맑이, 짜증을, 냈다. 1년이 넘도록 짜증이라곤 단 한 번도 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짜증 같은 건 안 내는 사람이라고, 짜증을 낸 적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해맑의 성격을 좋아했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짜증을 냈다.     


  -왜 짜증 내?     


  -니가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짜증을 내고 있잖아.      


  내가? 내가 아까부터 계속 짜증을 내고 있었다고? 리와인드를 해 보자. 카드 찍을 때, 카드 살 때, 엘리베이터 기다릴 때, 교통카드 자동판매기 찾을 때...     


  -그래, 안 그래?      


  해맑이 쐐기 같은 말을 박았다. 그랬다. 아까부터 계속 짜증을 내고 있었던 건 나였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나를 이루는 성격들 중에 못난 성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뾰족뾰족 튀어나왔다. 하나도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못나게 굴고 부끄러워졌다.      


  -미안해... 근데 나도 혼자 찾느라 힘들어서 그랬어. 나는 어디 있는지 막 찾고 있는데 오빠는 가만히 있잖아. 오빠도 같이 좀 찾아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때 오빠도 같이 찾아봐 줘... 나도 이제 짜증 안 낼게.      


  -알았어, 나도 같이 찾아볼게.      


  빠른 불만 제기와 빠른 사과. 서로의 마음은 다치지 않게,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는 것.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의 방향성까지 확실히 말하는 것. 해맑과 나는 이런 부분이 참 잘 맞는다. 이렇게 하자고 한 적은 없었지만, 둘 다 싸우는 걸 싫어하고, 싸우는 것보다 싸움을 질질 끌고 가는 걸 더 싫어하고, 아무리 화가 나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 똑같았다. 나는 다른 것보다 해맑과 내가 이러한 성격이 똑같아서 참 좋다.    

            





  배낭의 허리끈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잘 정리해두고, 캐리어가 문을 막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맸다. 그리고 다른 쪽 팔로는 해맑의 팔을 꼬옥-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큼 꼬옥.      

 

  MIND THE GAP.  MIND THE GAP.      




  런던 메트로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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