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r Ciel Jan 20. 2021

공간이 넉넉한 시간

[여행자의 걸음으로 나를 만나는 시간]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오랫동안 지내다 돌아오니 시차가 크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오래된 어른이 되었지만, 몇몇 거리와 장소들은 나를 여전히 적은나이 사람으로 생각하고 생경한 어른모습을 놀릴 때가 있다. 장소는 나와의 마지막 만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큰 회사가 많이 모여있는 그곳은,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한두 번 정도 갔던 기억 밖에는 없다. 마침 그 근처에 일이 있어 물건을 픽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큰길 대신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던 작은 길을 택했다.


앞 뒤 공간이 넉넉한 시간이 주어질 때, 공간은 비로소 타인에게 말을 걸어본다.

작은 길에는 식당들과 커피를 파는 곳, 차(tea) 전문점, 미니 마켓, 그리고 복사를 하는 곳들이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식당이나 카페 안쪽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큰길로 달리는 차들이 가엽게 지나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조금 더 작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몇 걸음을 지나니 깔끔한 종이상자로 만들어진 작은 집이 보인다. 그 안에는 잘 정돈된 붉은색 계열의 천들이 바닥에 놓여있고, 옆에는 사료와 물이 나란히 놓여있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고양이 두 마리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인사를 하려던 내 손이 미안하도록 눈을 맞추어 주지 않는다. 마주하고 있는 매운탕을 파는 집과 가정식 백반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는 마음씨, 솜씨가 좋은 분들이 골목길 고양이 자매를 챙겨 주시는 것 같다. 유리를 통해서 눈이 마주쳐서 나도 모르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작은 굴뚝 모양의 양철로 된 긴 통 위에 하얀 김들이 친절하게 뿜어져 나온다.  


 거리에는 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 가벼운 샌드위치나  가지 디저트를 함께   있는 곳이  많다. 그들은 한결같이 깔끔하거나 따뜻한 고운 얼굴을 하고 있다. 간판에 적혀 있는 그들의 이름은 다양하지만 장소와 이름이 닮아있다. 내가 쳐다볼 때마다 누군가가 또박하게 읽어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문득, 주말 오전마다 갔던 바다 넘어 Café 커피 향이  아래에서 머문다. 이곳의 커피집들은 내게는 오히려 이국적이다. 아직은.   지내다 보면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를 찾게 되겠지.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귄 것처럼.

 

통유리로 된 가게를 안고 왼쪽으로 돌아보니, 식물과 꽃화분을 파는 가게가 있다. 곱게 다듬어진 화분들과 꽃들을 창문을 통해서 구경을 하고 있으니, 긴 머리를 묶고 예쁜 앞치마를 두르신 아저씨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눈인사를 건넨다. 마음에 다가오는 작은 화분이 있었지만 눈을 딱 감고 돌아섰다. 내가 기르는 화초들은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생각이 난다면... 다시 시도해 보자. 잘 길러 보는 걸로.



앞 뒤 공간이 넉넉한 시간이 주어질 때, 우리는 각자의 '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모든 감각들을 집중하면서 길을 걸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때가 있기는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일 하는 환경이, 생활하는 장소가 물리적으로 확연히 바뀌고, 지금과 같은 억지로 맡겨진 시간이 도착하면, 언박싱 하는 순간이 도무지 고맙지 않다. 하지만 오늘처럼 새로운 것들을 찾게 되기도 하니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

 

어른들이 먹는 밥과 그들이 마시는 잔이 있었던 먼 기억의 거리에, 먹고 마실 수 있는 어른사람이 되어 여행자의 걸음을 걸어보았다. 어렴풋한 기억을 마주하고, 한 걸음씩 이야기를 맞추어 나간다. 얼마나 걸어야 점프컷 해서 들어간 나의 앵글이 어색하지 않게 될까. 그리고 어떤 이야기들을 담게 될까. 약간의 걱정과 설렘은 사이도 좋아 늘 함께 다닌다.

 

앞 뒤 시간과 공간이 넉넉해지면, 우리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나보다. 마음이 흐려질 때. 기억이 끊어진 장소에 여행자의 마음으로 걸어보는 것. 변한 것은 없는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시에 꽉 찬 무언가를 얻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시간을 내어 걸어 보기를 바란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늘 맑아 있기를. 글 넘어 소망을 담아둔다.


작가의 이전글 내 마음을 대신하여 톡톡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