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품은 우리들의 시간
3월은 봄을 머금은 시간이다.
겨울을 털어내고 파릇한 온기로 시작을 알릴 준비를 한다. 올해의 3월은 미나리가 봄의 전령사로, 한해를 잘 지내기를 응원하고 있다.
영화 ‘미나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것 저것 챙겨서 읽고 보게 되었다. 어제 보았던 정 이삭 감독과 스티븐 연의 인터뷰 장면에서, 옛 기억 하나가 떠 올랐다. 한 여학생의 두 눈에 가득했던 푸르름.
나의 친구 H는 Asian American 커뮤니티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도와주면서 몇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홍보하는 일을 함께 하기도 했었다. 한 번은 그녀를 따라 Korean American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1.5세와 2세,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게스트로 참석했고, 그저 듣고 있는 것만 했을 뿐이었지만, 그 회원들의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었는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회의가 끝나고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한 여학생과 긴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을 위해서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느새 두 눈에 가득 차 올랐던 그녀의 눈물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로 내게 전해졌었다.
이민 1세대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한 그 시간의 결실이, 자녀들로, 그 자녀의 자녀들로 이어가며,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정착하고 살아나가는 현실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보았다.
가족들 모두가 이민을 온 나의 친구들, 미국에서 태어난 나의 친구들, 어머니가 한국인이기에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서로 응원하고 있는 A. 그들의 살아온 시간들은 쓰여지지 않은 책으로, 전시한 적이 없는 사진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만의 책장과 서랍 속에서 묵묵히, 앞으로의 시간들을 일구어 나아갈 수 있도록 거름이 되고 햇살이 되어 응원한다.
2020년 3월 20일.
도시가 lockdown이 되고, 나는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재택근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1년 3월이 시작되면서부터 내 머릿속에는 3-20이라는 숫자가 거의 매일 지나다닌다. 1년 동안,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내게도 큰 변화가 왔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충격이 큰 것이 사실인 듯하다. 나 조차도 모르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들은 내 꿈속에서, 내 몸에서 나타난다. 나만 나약한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있고 싶지만, 사실은 많이 놀란 상태이고, 아직도 적응을 하지 못했으며,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달리던 시간이 멈추면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자리에 앉았다. 돌이켜보니,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던 미국이라는 곳에서, 나는 여행자와 Korean-American의 경계선을 밟으며 살아왔다. 나의 두 눈에는, 그날의 여학생의 눈에 가득했던 사랑과 미래에 대한 푸르름이 없었다. 나는 왜 그들처럼 미나리 씨앗을 심고 기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무서워서 그 씨앗들을 지금껏 손에 꼭 쥐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의 편식하는 귀 덕분에, 듣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 찬 몸이다. 이러니 균형을 잡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으려 몸을 굽히다 결국은 넘어졌다. 땅을 짚고 일어서 보려는데,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대지의 어머니는 딸 가족들을 위해서 고춧가루와 멸치를 싸서 한걸음 달려오신 할머니와 같다.
씨앗은 뿌리면 된다. 대지의 어머니는 뿌린 자에게 더 많은 씨앗을 주고, 그다음 세대가 커 나갈 수 있도록 품에 안고 챙겨준다. 내가 가진 미나리 씨앗을 다 써 버려도, 다음 해가 되면 내 손에 씨앗을 다시 담아 주시리라.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내 손에 있는 씨앗을 심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내친김에 미나리뿐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꽃도, 먹고 싶은 채소와 과일도 심어봐야겠다. 잘 자라면 자라는 대로, 흑으로 다시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나의 씨앗들과 함께 나도 뿌리를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대지의 품 안에 잠시 웅크리고 있다 보면, 나도 봄을 머금고 돋아 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이 대 자연의 이치이니, 편식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이제 그들의 모습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해야 한다.
당신도 씨앗을 품은 주먹을 쥐고 있다면,
손을 펴고 용기를 내어, 작은 화분에 삶을 내려 주시기를.
그리고 하나. 당신과 나, 우리들의 푸르름을 위하여 응원하고, 이다음 언젠가 서로의 색과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둘, 4월 25일.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도, ‘미나리’가 피어 날 수 있기를.
img 00 : La haie de roses by HENRI-EDMOND CROSS LINK
img 01 : Saint Joseph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