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학에 대하여
“Carina!”
어느 날, 기억의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R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다. 고음의 따뜻하고, 약간은 거친 손끝처럼 들리는 소리다. 다 큰 학생이었지만, 서툰 이탈리아어 때문이었는지 할머니는 나를 아이처럼 대하셨다.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아이의 언어’로 들렸을 것이다.
할머니는 딸 셋을 키워내고, 예순이 되던 해 남편과 이혼하시고 홀로 살기 시작하셨다. 일주일에 세 번 일을 하시고, 그중 하루는 새벽부터 산을 오르고 해 질 무렵에야 돌아오셨다. 또 다른 하루는 전남편의 어머니가 혼자 지내는 집을 찾아가 청소와 식사를 챙겨 드렸다. 장이 서는 수요일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도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왔다. 오래된 손수레가 달린 장바구니를 내가 끌면, 할머니는 팔을 내밀었고, 우리는 팔짱을 끼고, 발을 맞추어 원-스텝, 투-스텝 하면서 걸었다.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박자를 맞추어가는 소리였다.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이성보다 직감을 따른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내 마음 어딘가에 “이탈리아에 가면 좋을 일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의 소리가 있었다. 그 메모를 소중히 접어 마음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결국 다시 열어보고 결정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치르치르와 미치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서 현지인과 함께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홈스테이를 결정했다. 좋은 분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그 응답이 R 할머니였다. 이혼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외국인 학생을 처음 받게 되었는데 그 첫 학생이 나였다.
할머니 덕분에 나는 빠르게 언어를 습득하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워낙 외향적인 분이셨고, 나를 이뻐해 주셨다. 딸 하나가 더 생겼다고 하시며 가족들뿐만 아니라 친구분들께도 소개해 주셨다. 쉬는 날이면 할머니의 “작은 차(piccolla macchina)”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할머니를 통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의 공기와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함께 대화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 시절의 온도와 냄새가 나라는 사람의 색을 깊고, 다양한 색채로 만들어 주었다. 그 시간의 질감이 손끝에 남아 있다. 오래된 이탈리아의 돌바닥처럼, 조금은 거칠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을 단단함이다.
보석사 수업이 있는 날이면, 특히 그날 배운 내용과 연결되는 빛의 조각을 보러 갔다. 가끔 교재 속 사진에서만 보던 작품이 눈앞에 있을 때면, ‘이곳에 공부하러 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숙제처럼 시작했지만 작은 기쁨이 되어, 설레는 마음이 너무 앞선 어느 날은 창문 유리에 이마를 ‘콩’ 부딪히기도 했다.
박물관의 유리 안, 오래된 주얼리들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몇백 년 전, 누군가의 하루를 품고 있던 빛이었다. 그 빛은 사람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축복의 날에도 이별의 순간에도 그들의 손가락과 손목에서, 목과 귀를 타고 얼굴을 반짝여 주었을 것이다. 모든 소리가 멈춘 자리에서, 나는 메모를 하고 스케치를 했다.
보석 디자인을 배우고 돌아왔지만, 그 배움이 ‘직접’ 쓰인 것은 많지 않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R 할머니를 만난 일, 그리고 그녀와 보낸 시간이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만들어주었던 이탈리아 가정식 백반, 올리브오일을 넣은 간단한 스파게티, 그리고 명절이면 함께 만들었던 음식들. 그 모든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조명처럼 켜진다.
그 시간이 주었던 온도와 냄새는 감정과 사물의 리듬을 다르게 연주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때의 색은 햇살을 품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따뜻한 기억이 되었다. 동시에 딱딱한 돌바닥 위에 길게 늘어선 내 그림자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길이 맞을까?” 회색의 빛을 품은 질문은 라브라도라이트 같기도 하다. 유학의 기억은 보석을 이루는 작은 면이 되어, 나도 몰랐던 반짝임이 내 안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