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알고리즘은 가끔, 취향의 공백을 적당한 변화로 메워준다. 물론 획일화라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의외의 신선함을 기대하게 된다.
주말의 느린 오전, 커피를 마시며 무심히 동영상 섬네일들을 넘기다, 피렌체 예술대학 학생의 브이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한 여학생이 집을 나와 학교로 걸어가며 오늘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었다. 낯익은 길과 돌바닥, 골목 끝의 붉은 지붕이 보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이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피렌체에서 보석 디자인과 보석사를 공부했다. 이제는 먼 이야기다.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며 살고 있다. 그 시절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도 그날 알았다. 영상 속 피렌체의 돌바닥과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공항 입국장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가족들의 얼굴처럼 다가왔다.
아주 가끔이지만, 보석과 관련된 일을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뒤로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어릴 때 우연히 보았던 예비 신부의 울음일 수도 있고, 큰 보석을 손가락에 올려두고 목소리를 높이던 어른의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그 모든 것이 조금은 세속적으로 보였다. 빛나지만, 공장에서 만들어진 유리 조각처럼 진짜 빛을 흉내 내는 조명 아래의 번쩍임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 상황을 바라보는 알고리즘도 달라진다.
그날 예비 신부의 울음은 다이아몬드 1캐럿에 집착한 눈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유독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서, 반짝임을 붙잡고 싶었던 마음이 녹아내린 거다. 손가락에 걸린 보석도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억의 선물일 수 있다. 꾹꾹 누르고 있었던 인내의 한계가 폭발하던 바로 그 모습을 내가 보았을 수도 있다.
보석은 대지의 압력 속에 천천히 자라난 결정이며, 바다의 호흡을 닮은 진주와 산호의 기억이다. 인간의 손끝이 그 빛을 다듬어, 한 사람의 시간과 닮은 형태로 완성된다. 그것은 단순히 화려한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날에 전하는 선물이며,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어머니가 딸에게 전해주는 손끝의 유산, 지워지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는 약속이 담긴 작은 빛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먼저 내 안에서 울림으로 다가왔다면, 그때의 결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내게,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았던 이 일은 언제나 ‘어땠을까?’ 하는 질문으로 남아 있었다. 불쑥, 비일상적인 모습으로 내게 나타나 인사를 할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언젠가 이 문제를 마무리하리라 생각했지만, 지금껏 모른 척하고 살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는지, 아니면 지나간 일에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알고리즘은, 그런 나의 손목을 잡고 피렌체로 데려다주었다. 영상 속 여학생이 걷던 거리, 내가 걷던 바로 그곳. 마치 우리 집 앞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듯했다.
나는 그녀의 카메라 옆에 서서, 그때의 나를 바라보았다. 트램의 느린 소리를 배경으로, 이탈리아어 더빙이 없이 볼 수 있었던 영화관 앞을 지나, 창문 너머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는 피렌체 대성당 앞을 관광객들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마침표를 찍는 일은, 시간보다 용기가 더 필요한가 보다.
어쩌면, 나는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회나 미련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성이나 성찰도 아니다. 다만, 내 마음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이 조각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감정은 흘러넘치지 않고,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이라는 물리적인 형태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보게 되었다.
‘빛의 조각을 다듬는 시간’은
보석의 단면처럼 삶의 시간을 세공하며
빛의 리듬을 기록한 이야기다.
결국 반짝이는 것은 보석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시 빛나는 나의 시간임을 말한다.
이 책은 나의 오래된 숙제를 마주하는 기록이다. 이탈리아의 기억 한 편,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이야기 한 편, 그리고 일상 속 보석에 관한 여덟 개의 단면,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한 개의 빛, 상상의 보석. 에필로그로, 한때 나를 붙잡고 있던 시간에 작별 인사를 건네려 한다.
당신에게도 그런 보석이 있을지 모른다. 한때 반짝였으나, 마음속 서랍에 넣어 두었던 어떤 것.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의 기억 속 보석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면, 그것은 어쩌면 서로를 응원하며 건네는 작은 인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