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6살 때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을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들어 읽었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면서 느낀 경험에 관한 것이지만, 많은 부분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과 방법이 담겨 있었다.
'결국 사랑이 전부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들이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은 정신건강에 필수적이며 자기 절체의 초석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돌보게 된다. 자기 절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저자는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은 '사랑'이라고 하며, 사랑은 부모가 쏟는 '시간'으로 실행된다고 한다. 시간을 들여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이가 스스로 소중하다는 '자기 존중감'을 심어주며 이를 바탕으로 아이는 '즐거움을 안심하고 뒤로 미룰 수 있는' 자기 절제를 배운다고 한다. 이것은 황금보다도 더 값진 부모의 선물이며 어린 시절에 획득하지 않으면 성인이 돼서 얻기가 매우 힘들다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 낭만적인 표현과 이상적인 개념들이 넘쳐나지만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고 실행되는지에 대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히 아이를 기르면서 남녀 간에 열정적인 사랑과 완전히 다른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모호하면서 편협하게 또는 너무 광범위하게 쓰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랑은 '시간'이라는 이 명쾌한 설명은 '사랑'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움을 해결해 주었고,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동안 내가 술자리에서 내뱉었던 가족에 대한 사랑, 헌신은 그저 머릿속에 실체 없는 관념이었고 자기만족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가? 내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아이들에게 시간을 쏟는가?'
난 거의 아이들에게 시간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보냈던 시간은 부족한 잠으로 고통스러웠으며, 지루하기만 했었다. 회사에서 야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올 때면 힘드니 아무도 건들지 말라는 듯 짜증을 내고 불평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가족과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시간을 하나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누구나 다 그런다고 합리화했다.
그런데 '사랑은 시간이다'라는 말은 나의 태도를 바꾸어놓았고, 한편으로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황금보다 가치 있는 부모의 가장 값진 선물인 아빠의 사랑은 하루에 24시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루 24시간으로 제한된다. 돈처럼 저금해놓을 수도 없다. 부족하기 때문에 소중하며, 소멸되기 때문에 '나중에'란 있을 수 없다.
사랑에 있어서는 재벌도, 유명 연예인도, 스포츠 스타도 평범한 나와 같이 동일한 출발선에 있다.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은 내가 더 유리하다. 평범하기에 그들보다 황금보다 더 값진 사랑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다.
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많은 노력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러기 위해선 나에게 가장 시간을 많이 뺏어가는 '술'을 포기했다. 가족 밖에서 더 즐거운 것들을 하나둘씩 멀리하기 시작했다.
난 열심히 아이들과 같이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책도 읽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커질수록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다시 사는 것 같았다. 봤던 영화를 또 봐도, 읽었던 책을 다시 봐도, 어릴 때 그렇게 하기 싫던 수학 공부도 시간을 들여 아이 들과 함께하다 보니 신기하게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에 뿌리내려지면서 아빠로서 내 역할을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부부 간에도 내 자리는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지만, 내 아이들의 아빠로서 나는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어떤 긴급한 위기가 닥칠 때 아이들을 위해 날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어느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은 모든 동물이 갖고 있는 종을 보호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없었던 숭고한 느낌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데, 아들이 미래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 처음에 난 외교관이 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바쁜 것 같아. 해외를 돌면 너무 자주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해서 별로인 것 같아. 난 아빠처럼 평범하지만 자식들과 이렇게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직업도 좋은 것 같아 "
"아들, 어떤 직업이든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좀 덜 소중한 것을 포기하기만 하면 돼"
난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아들이 커서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난 사랑을 충분히 받았어'라고 기억할까? 난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것인가? 늦었지만 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내 아이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