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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Nov 09. 2019

니 얼굴이 여기서 제일 커

이탈리아, 못남에 집중하는 습관

밀라노에서 트램 파티가 있었다. 철로를 따라 달리는 노란색의 오래된 트램은 190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밀라노 시내 구석구석을 누빈 지 100년도 더 넘는 교통수단이다. 이제 막 20살이 된 새파란 젊은이들이 생각하기에 그 유구한 역사에 가장 걸맞은 활용처란 역시 맥주파티였던 건지, 코끝이 쌀쌀해지는 겨울의 문턱에 대학생들을 위한 트램 파티가 열렸다. 


주최자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하다가 그 파티에 참석하게 된 것인지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나는 같이 밀라노에서 공부하던 친구들과 함께 트램에 올라탔다.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로 트램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몸을 크게 움직일 수도 없고 그저 좌석을 밟고 올라서서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얼굴만 빼꼼히 내미는 것밖에 트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지만, 그래도 신이 났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맥주가 공급되었고, 시내를 달리는 트램 위에서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신나게 놀았다. 너무 많이 마신 맥주 덕에 몇몇의 얼굴이 노랗게 뜨다 못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할 때 즈음 트램은 잠시 멈추었고,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용수철처럼 뛰쳐나가 각자의 시급한 용무를 해결했다. 남자아이들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벽을 향해 일렬로 섰고, 여자아이들은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밤이 무르익어 가면서 나의 흥도 점점 오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아무 전후 연결고리도 없이 훅, 같은 학교를 다니던 한국인 언니가 나에게 '야, 니 얼굴이 여기서 제일 커!'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난 심지어 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도 않았는데! '응, 그다음은 언니야'라고 말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갑자기 뺨을 후려 맞은 기분이 들어 그저 머리가 하얘졌을 뿐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다 나보다 큰데, 그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나보다 훨씬 작은 면적의 얼굴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싸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문득 모든 걸 제치고 이 말을 꼭 해야겠다 싶을 만큼 나의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사실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언니는 종종 내가 나를 잊고 한참 '지금'에 몰입해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을 골라 나의 '못남'을 주지시켜 주었다. 그런 말쯤은 그저 무시해 버리고 싶었지만, 정말 못나게도 언제나 나의 멘탈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여서 그 말을 들은 이후의 파티는 완전히 빛을 잃었다. 잘 있던 내 얼굴이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커져버린 것도 아닌데,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우습지만, 그 나이의 나는 자신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과 자신감이 부족했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 마음은 지나치게 컸다. 그렇게 잘 흔들렸다. 


자신에 대한 믿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 지금의 기분 같이 중요한 것들이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타인의 한 마디에 휘둘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물론 언제 들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말은 존재하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회색빛으로 변할 만큼 영향을 많이 받아서야 되겠나. 그런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쉽게 상처 받고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과 말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학기가 끝나갈 때쯤 엄마가 찾아오셨다. 1년 만에 보는 엄마를 데리러 공항으로 마중을 갔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그때를 회상하면서 말씀하셨다. 저 멀리서 새카맣게 타서 눈코 입도 잘 안 보이는 데다가, 살은 공격적으로 올라있고, 미용실은 언제 다녀왔는지 가늠도 안 되는 산발의 머리를 한 여자애가 다가오는데, 너무 자신 있고 당당하게 웃고 있길래, 쟤는 자기가 산발의 흑돼지인 걸 모르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알고서야 저렇게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격렬하게 손을 흔들며 뛰어올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 순간 엄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잘 모르나 본데, 너 지금 돼지야'라고 말해줘야겠다가 아니라 저렇게 밝고 씩씩하고 자신감에 가득 찬 딸이어서 너무 보기 좋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설마 쟤가 내 딸인가... 싶어서 몰라본 건 사실이라고 시인하셨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견 말고 뭐가 또 중요하겠는가? 다름에 열등감을 담아 '못남'으로 탈바꿈시키고, 늘 그 못남에 집중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지 말자. 살다 보면 도대체 나한테 왜 저럴까 싶은 사람을 마주치게 될 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이 내 인생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 타인이 내뱉는 부정적인 평가는 내가 아닌 그 사람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것 때문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쓸데없는 고민과 분노로 허비해 왔다는 것에 화가 난다. 밀라노 트램 위에서의 내 얼굴 크기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한 치도 변함이 없지만, 나는 이제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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