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2), 별 거 아닌 것을 아는 지혜
이집트는 가는 곳마다 바가지요금을 씌우기 때문에 매번 흥정을 하는 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손님마다 다른 가격을 부르는데, '호갱 지수'를 판단하고 얼마를 부를지 그때그때 결정하는 듯했다. 룩소르 서안 투어를 예약할 때 분명 앞사람에게 부른 가격을 들었는데 나에게 약 1.5배를 불렀다. 나는 꽤 호갱 지수가 높은 사람이었다.
룩소르 서안에서 왕의 계곡, 왕비의 계곡, 핫셉수트 장제전을 보며 절대 권력을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사후세계를 위해 그들이 들인 노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거대한 건축물과 수많은 보물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매혹적인 벽화를 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투입되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신전을 나와 거리로 나서면 모든 것이 먼지에 뒤덮여 있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당나귀, 말, 소, 그리고 사람들까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삐쩍 마르고 고단해 보인다. 짓다 만듯한, 아니 차라리 부수다 만듯해 보이는 집들을 보면 차라리 수천 년 된 신전이 훨씬 상태가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신전의 환상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눈으로 바라본 이집트는 여전히 파라오가 지배하는 곳 같았다.
이집트에서는 사람들한테 탈탈 털린 기분이 들다가도 또 기대치 않았던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받기도 했다. 아스완에 짐을 풀고 에드푸에 호루스 신전을 보러 갈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비조라고 하는 작은 버스와 합승 트럭을 타고 에드푸로 갔는데, 버스를 가득 채운 현지인들 사이에 유일한 관광객으로 앉아 있자니 뭔가 진정한 여행자가 된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신전을 돌아보고 아스완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비조 정류장에 가자 외국인은 비조를 탈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비조를 타고 에드푸에 왔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봤자 먹히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일단 내리라고 해서 내렸는데, 큰 길가에 간이 건물로 된 경찰서 같은 곳이었다.
땀이 줄줄 흐르는 한낮의 땡볕을 그대로 받으며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한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 이름이 뭐야?"
"...."
"왜 화났어?"
"...."
"왜 이렇게 불행해 보여?"
대꾸도 않고 한참을 혼자 식식거리며 앉아 있다가 제 분에 못 이겨 눈물이 났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에게 그가 다시 다가오더니 왜 우냐고 상냥하게 묻는다.
"흐어어엉, 흐엉, 내가, 비조... 흐엉... 아스완... 엉엉.... 걔네가 못 타게.. 우와아아앙"
"아스완까지 가야 해? 아스완에 가면 행복해?"
경찰은 내 손에 휴지를 쥐어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성큼성큼 큰 길가로 걸어가 대뜸 지나가는 봉고차를 멈춰 세웠다. 뭐 때문에 길에 차를 세워야 했는지 영문을 모르는 운전사가 얼굴을 내밀자 경찰은 손으로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가리키며,
"너, 내려"
라고 명령했다. 그 한마디에 조수석 자리를 빼앗긴 남자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이미 만석인 뒷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경찰은 나에게 빈 조수석에 앉으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운전사에게 이 아가씨를 아스완의 호텔 정문 앞에 안전하게 내려주고, 차비도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놨다. 봉고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경찰은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주일 동안 신전만 보고 돌아다녔더니 마지막 날 보았던 아부심벨의 신전은 지금 와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내 기억을 메운 것은 아부심벨로 향하던 길과, 그곳에서 만난 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새벽 3시에 아부심벨로 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바라본 밤하늘은 정말 기가 막혔다. 사막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뚫려있는 도로 말고는 땅 위로 솟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모래와 하늘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새카만 하늘에는 별이 꽉 차 있었고, 그 별이 끝나 있는 곳이 지평선이었다. 꿈같다... 고 생각했는데, 정말 잠이 들었나 보다. 누군가 나를 다급하게 깨웠다. 거리를 가늠할 수도 없는 저 앞 어딘가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온 대기를 가득 채우며 어둠을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빛을 가로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곧 그 빛이 그대로 직진해서 나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 풍경 같지 않았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부심벨에서 만난 언니의 이야기는 아직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녀는 돌아갈 날을 정해두지 않은 채 커다란 가방에 몇 달치의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가방을 도둑맞고 남은 것은 여권과 지갑, 여행책을 넣은 작은 배낭, 그리고 용기 내서 떠나온 여행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가방도 없이 며칠을 혼자서 마구 울었다. '이제 어떡하니?', '힘들겠다'라며 같이 걱정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껏 불행에 취해있을 때, 누군가가 '그깟 가방 잃어버린 게 뭐 대수야? 다치지 않았으니 됐어'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 그냥 가방 하나 잃어버린 건데 뭐. 나를 만났을 때 이미 그녀는 사람들에게 나눠 받은 물건으로 나보다 더 큰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별거 아닌 불행이 지금의 행복을 잡아먹게 만들지 말 것. 사람들은 앞에 닥친 문제가 크든 작든 자신도 모르게 자꾸 그 문제에 사로잡혀 함몰되어 버리기 쉽다. 중요한 게 뭔지를 잘 아는 것...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되어 쌀쌀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사람 때문에 지긋지긋했고, 사람 때문에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된다, 호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나를 여행 내내 날 서게 만들었다. 물론 학생이었던 그때에는 주머니가 상당히 가벼웠다(지금이라고 뭐 대단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서 돈 한 푼에 예민하게 굴고, 물건을 사라고 말을 거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톱을 드러내며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찌나 미간을 찌푸리며 다녔던지 낙타를 타라고, 물건을 사라고 하던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났어?'라고 물었다. 내가 관심 없다고 쏘아붙이면 그들은 그저 웃으며 '오케'라며 다른 손님을 찾아 나섰다.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건 나였다. 물론 내가 주로 당하는 쪽이어서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그들이라고 그렇게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마냥 신나기만 했을까.
별 거 아닌 것과 별 거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별 거 아닌 것은 웃어 넘길 줄 알고, 별 것인 것에는 단호하게 대하되 불필요하게 감정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 감으면서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일에는 길길이 날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집트 여행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 만큼 정말 내가 화를 냈어야 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 이야기들을 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