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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숲 Feb 26. 2023

꼬마김밥

세입 거리 집착

떠오른 것을 해결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실천에 옮기거나 다음으로 미루는 거나 잊는 것이다. 당장 실행하기 위해서는 의욕과 부지런함이 필요하고, 다음으로 미루기 위해서는 잘 세운 계획과 기억력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잊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내게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 잊는다는 것은 영 어려운 일이라 떼어내지 못한 메모장처럼 머릿속에 달랑거리는 것들이 잔뜩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음식이다. 한 번 떠오른 것은 먹고야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꽤 고집이 있는 집착이어서, 먹기 전까지는 내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다. 다른 일에 이런 집착을 가졌다면 꽤 좋은 성과를 얻을 수도 있었겠건만 하는 안타까움이 들 정도이다.


음식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다양한 매체와 상황으로부터 온다.

누군가 '거기 밤떡이 유명해요' 하고 말하면, 어느덧 밤떡의 형상과 촉감과 맛을 그리게 된다. 찹쌀을 익반죽 하는 과정까지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말랑한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어  달콤한 팥을 펴 바르고 그 위에 그 위에 노란 알밤을 얹어 만들었겠지. 말랑하고 달콤하다니! 맛보고 싶어 동동 거리는 마음이 어느덧 공주까지 날아간다. 몸은 시간에 묶여 날아가지 못했으니 공주로 떠나 손에 넣기까지 밤떡은 머릿속에서 달랑거릴 것이다.

영화나 책으로부터 입력받는 일도 자주있다. 팥죽을 파는 만드는 장면를 잠깐 보았을 뿐인데 어느덧 혀에 감기는 진한 단맛과 부드러움에, 톡톡 걸리는 팥 알갱이를 떠올림과 동시에 죽집을 향하는 동선을 따라가고 있다. 조만간 빠른 걸음으로 팥죽을 품에 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음식이 나올 때마다 메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크게 와닿지 않는 일도 흔하고 그런 것도 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스칠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것들은 깊이 새겨지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아는 맛'이다.


나는 새로운 맛을 즐기는 편이 못된다. 가던 음식점을 주로 가게 되고, 먹던 것을 주문하다. 처음 보는 메뉴를 주문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 실패했을 때에 인생에 유일무이한 한 끼를 이렇게 놓쳐버렸구나 하는 후회막심을 이겨내지 못할 것만 같아서이다. 이것도 한 끼에 대한 집착일지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달랑거리며 자리 잡은 것은 꼬마김밥이다.

그러니까 이 메뉴는 전철 안 옆자리 승객의 대화로부터 입력되었다. 그들은 주말의 등산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오르는 도중 한숨 돌릴 때에 먹을 것을 나누어 챙겨가기 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와 초코바가 등장함에 이어 꼬마김밥을 사가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이름도 귀여운 꼬마김밥은 말 그대로 보통 김밥보다 크기가 작다. 이 작은  녀석이 종류는 다양해서 여러 모습을 가졌다. 진득한 쌀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에서는 속 재료를 한 가지씩만 넣어 진열해 둔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나 맵게 무친 오징어채, 불고기 등이 그것인데, 흔히 들어가는 단무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재료의 맛에 집중할 수 있지만 김밥이라 불리기엔 조금 서운하다. 겨자소스를 넣어주는 시장의 꼬마김밥 집에서는 당근 한가닥, 단무지 한 개, 시금치 한 줄을 넣어 준다. 소스에 찍어 먹으면 짭조름한 쏘는 맛이 일품이지만 재료의 소박함이 야박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꼬마김밥은 속이 꽤 알차다. 단무지, 당근, 오이, 우엉, 계란까지. 보통 김밥의 축소판이다. 주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말아 주는 데다가 참기름도 깨도 아낌없는 인심에 고소함이 넘친다.


역 근처에 자리 잡은 이 집은 해가 뜰 무렵부터 문을 연다. 그러나 그 시간에는 여간해서 사지 않는다. 집착의 해소는 뿌듯한 식사가 기본 조건이라 이 맛난 아이를 출근길에 급하게 먹을 수는 없다. 오늘 한 일에 대한 후회와 내일로 미룬 일에 대한 부채를 안은 퇴근길, 아슬아슬 문 닫기 전의 꼬마김밥을 손에 넣는다.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오늘의 보상이다.


덩치가 커진 김밥들처럼 흐뭇하게 한입 가득 채울 수는 없지만 작게 말린 밥알이 도록도록 굴러다니는 맛이 있다. 한입에 괜찮아, 두입에 고생했어, 세입에 내일 일은 내일의 나를 믿어보자. 세입 베어 물면 충분한 작은 김밥이, 위로와 수고를 전한다. 달랑거리던 메모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다음 집착은 조금 천천히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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